오랜만에 걷는 장거리를 걷는 날이었다.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거리는 무려 29km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초반에는 항상 30km 정도의 거리를 걸어왔던 우리 였지만 후반부인 오늘 29km를 걷는 것은 꽤나 무리가 되는 일정이었다. 나도 아내도 오늘 얼마나 걸어야 할지를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결국 서로를 지나치게 배려함으로 인해서 둘 다 원하지 않는 거리를 걸어야 했다. 다만 긴 거리를 배낭을 짊어지고 갈 자신이 없어서 오늘 역시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는 선택을 했다.
몇해전 방송된 god의 같이 걸을까 에서 그들은 아침에 걷는 게 잘 걸어진다면서 "아침빨"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나는 이 말에 적극 동의한다. 밤새 휴식을 취하면서 조금은 나아진 몸상태로 해가 뜨지 않아 아직 더워지지 않은 아침은 정말로 걷기에 최적인 것 같다.
아내와 나는 아침빨을 느끼기 위해 항상 아침 일찍 나와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면서 걷는 것을 참 좋아했다. 해가 뜰 무렵은 하늘색이 푸르스름함 에서 보라색으로 변하고 다시 빨간색으로 변했다가 하얗게 변하는데 그 모습은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고 사진으로 담아내기도 힘들었다. 오로지 눈과 몸으로 느껴야 하는 아름다움 이었다. 게다가 그런 일출을 맞이 하며 몸을 움직일 땐 대부분 몸이 가벼웠다.
6시 30분 오늘도 어김없이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이른 시간이 주는 아름다움은 사리아에서 출발한 날을 제외하곤 항상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게다가 푸르스름한 새벽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좋았다. 배낭 없이 시작한 하루여서 그런지 아침 빨 덕분인지 발 저림은 있지만 발목 통증이나 정강이 통증은 거의 없었다.
팔라스데레이를 출발 하고나서 오늘의 1차 목적지인 멜리데 까지는 15km 정도의 거리였는데, 아침빨 덕분인지 너무 이른시간에 출발한 것 때문인지 생각보다 이른 시간인 9시 30분쯤 멜리데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시속 5km 의 속도로 거의 3시간을 쉼없이 걸었다. 15km를 3시간 동안 걷는데 다리에 통증도 거의 없었다. 아마 우리가 오늘 걷는 길을 나눠 걷기로 했다면 우리 일정은 9시 30분인 시간에 멜리데에서 끝마칠 수 있었지만 멜리데는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꼭 맛보아야 하는 몇 가지 음식이 있다. 하몽, 빠에야, 카페 콘레체, 보카디요, 샹그리아, 타파스 등등등 그중에 멜리데에서는 문어 요리인 뽈뽀가 아주 유명한 음식이었다. 바다도 없는 스페인 내륙에 웬 문어가 유명한지 이해가 안 갔지만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는 멜리데의 뽈뽀를 안 먹고 갈 수는 없었다.
멜리데 마을 중간쯤부터는 몇 군데의 뽈뽀 가게가 아침부터 문어를 삶는 건지 찌는 건지 연기를 풀풀 내면서 맛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흡사 한겨울에 볼 수있는 만두 가게의 모습과 같았는데 아내와 나는 여러 가게 중 가장 연기가 심하게 나는 가게에 들어가 앉았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탓인지 가게에는 사람이 몇 없었지만 우리보다 먼저와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순례자 들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뽈뽀와 빵을 시키고 앉아 있으니 약속도 안 했는데 반포 아줌마 부부가 들어왔다.
"왜 여기 또 있어요?"
"안녕하세요 하고많은 가게 중에 또 우리가 온 가게를 따라 들어오셨네요?"
"우리 같이 앉아 먹어요"
"좋아요 저희는 벌써 주문했어요 여기 앉으세요"
사리아부터 엄청나게 많아진 사람들 덕분인지 뽈뽀 가게는 우리 음식이 채 나오기도 전에 어느새 많은 인원들로 붐볐다. 헌데 이들이 전부다 와인 대신에 이상한 술을 한 병씩 시켜 먹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알아보니 이술이 갈리시아 지방 전통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뽈뽀만 생각하면서 왔는데 갈리시아 전통주를 모두가 마시고 있으니 우리라고 안 마셔 볼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반포 아줌마 부부와 함께 마시려고 와인과 맥주를 시켜놨었는데 그렇다고 이곳 까지 와서 남들이 다마시는 갈리시아 전통주를 맛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반포 아저씨는 약간 애주가 같은 느낌이 있었다. 갈리시아의 전통주도 추가로 주문해서 마셔보니 전통주의 도수가 꽤 높은 편이었다. 한잔을 마시자 목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두 잔을 마시자 내 장기가 어디에 붙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엄청나게 유명한 뽈뽀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맛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먹었던 뽈뽀와 와인 그리고 갈리시아의 전통주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 들이라면 꼭 들러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뽈뽀가 너무 맛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뽈뽀 가게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분위기와 함께 마음과 육체를 충전할 수 있는 시간 때문 에라도 말이다.
술도 잘 못하는 내가 아침부터 도수가 높은 술과 와인과 맥주 까지 섞어 마시면서 술은 남기지 않는 것 이라며 주문했던 모든 술을 반포 아저씨와 둘이 다 마셔버렸더니 아직 아침도 채 지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앉은뱅이가 될 뻔했다. 아마도 어제 아내와 내가 서로가 지나치게 배려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은 멜리데에서 쉬고 다음날 출발했을 것이었지만, 이미 배낭도 동키서비스를 통해 보내놨고, 아직 시간도 이른 시간이라 억지로 엉덩이를 떼어 보았다. 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핑핑 도는 머리는 한동안 되돌아오지 않았고 덕분에 걸음 속도는 매우 느려져 버렸다.
게다가 멜리데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배낭은 동키 서비스를 이용했지만 우의는 따로 챙겨놨었기에 우의를 입고 다시 아르수아로 향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 보니 외국인 한 사람이 우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봐왔다며 우리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아직 한 번도 말을 나눠보지 못한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우리를 자주 봤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외국인과 같이 사진을 한 장 남길걸 하는 생각이 든다. 흔쾌히 사진을 찍고 걷다가 보니 들판에 빨간색 꽃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푸른 밀밭에 간혹 빨간색 꽃이 피어 있었다. 초록색 밀밭에 빨간 점을 찍어둔 듯한 꽃은 봄에 걷는 순례길이 주는 매력 이었다.
사실 산티아고 초반에 아내에게 길에 피어있는 꽃을 한번 꺾어준 적이 있다. 그런데 매일매일 짐을 싸고 숙소를 옮기고 걷다 보니 그 꽃이 어딘가에 버려진 것 같다. 나는 아내에게 구박 아닌 구박을 하며 앞으론 다신 없을 거라며 마지막 꽃이라고 얘기하며 꽃을 꺾어줬더니 아내는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날 꺾어 주었던 꽃을 아주 고이 고이말려서 간직하고 있다.
오늘도 여지 없이 길을 걷다 일정의 후반부가 되지 또다시 정강이가 아파 왔다. 아침엔 괜찮던 다리가 왜 후반부만 되면 이러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르수아에 도착하기까지 8km 정도 남았을 때부터는 정강이가 끊어질 듯이 아파왔다. 이상하게도 동키 서비스를 이용했을 때마다 정강이가 더 못 버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키 서비스를 이용한 덕에 더 많은 거리를 걷는 욕심을 부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내에게 잠시 쉬었다 가자고 얘기하고 앉아서는 무려 1시간을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정강이 통증은 나아지질 않았다. 지난번 폰페라다를 갈 때처럼 이미 배낭을 보내 놔서 아르수아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든 가야 했기에 아픈 다리를 이끌고 억지로 억지로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남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 속도로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한쪽 다리가 아팠기에 안 아픈 다리로 깽깽이도 뛰어봤지만 그렇게 8km를 갈 수는 없었다.
아내는 또다시 택시를 타고 가자고 나를 설득했는데 나는 왠지 모르게 다시 한번 택시를 타는 것이 정말 싫었다. 한 번은 그럴 수 있지만 두 번 다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허허벌판을 걷고 있기에 택시는커녕 bar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절뚝절뚝 거리며 길을 걸어가고 있자니 눈앞에 나만큼 절뚝절뚝 거리는 덩치 큰 외국인이 보였다. 외국인과 나는 서로가 걷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터져 버렸다. 우리는 웃으며 파이팅을 건네주었고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아주 아주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다리를 질질 끌다 시피 하며 걷다 보니 아르수아 전 마을인 작은 마을이 나왔는데 조금 쉬었다 갈 요량으로 bar에 잠시 앉게 되었다. bar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누가 아는척을 해서 보니 여지 없이 반포 아줌마 부부가 나타났다. 반포아줌마 부부는 어느새 우리보다 먼저와 이곳 bar에 있었고 bar 는 알베르게와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반포 아줌마 부부는 오늘은 그곳에서 머문다고 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아직 3km를 더 가야 하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여기 앉았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헌데 배낭을 보내 놔서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반포 아저씨한테 통증을 호소했더니 잠시 기다려 보라더니 다시 오셔서는 내 정강이에 파스를 한 장 붙여줬다. 그러면서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지만 정말이지 나는 택시를 타고 가기가 너무 싫었다.
그리고 이제 아르수아 까지는 3km 밖에 안 남았으니 어떻게던 남은 거리를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는 내덕에 자기 속도로 걷지도 못하고 내 옆을 지지 해주며 함께 해줬다. 물론 택시를 타고 가자고 계속해서 설득했지만 나는 끝내 그 말을 무시하면서 길을 걸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드디어 아르수아에 도착을 했다. 아침 6시반에 일정을 시작해서 멜리데에 도착한 시간이 9시 반이 었고, 멜리데를 다시 출발 한 시간이 10시반 이었는데, 멜리데로 부터의 거리는 고작 14km 밖에 안되는 거리 였지만 정강이 통증이 너무 심해서 14km 의 거리를 무려 7시간이나 걸려서 아르수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아침에 15km 의 거리는 3시간 만에 걸어가 놓고는 멜리데를 지나서 14km 의 거리는 7시간이 걸렸으니 통증으로 인한 걸음 속도가 얼마나 떨어졌었는지... 게다가 늘 1~2시에 일정을 마무리 했던 우리 였는데 5시가 넘은 시간에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그 피로도가 엄청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는 배낭이 도착해 있는 곳이 아르수아에 가장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 였다. 거리는 29km 정도였지만 아픈 다리 때문에 무려 11시간 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만약 다음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온다면 그때는 무겁더라도 배낭을 짊어지고 걷거나 거리에 대한 욕심을 갖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을 했다.
몸은 너무 힘들었지만 다행이 아르수아의 알베르게 역시 컨디션이 꽤나 좋았다. 최근 숙박하게 되는 알베르게는 대부분 상태가 좋은것 같았다. 알베르게는 비록 다인실이지만 커튼을 만들어서 우리의 독립된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고 게다가 오후 늦게 도착했음에도 알베르게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오랜만에 호텔에 들어온 기분이라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몸상태는 점점 지쳐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계획 대로 된다면 이제 오늘을 빼고 2일만 더 걸어 가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날이었다. 벌써 750km를 걸어왔는데 사실 산티아고가 지척인 지금도 뭘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아내와 나는 "우리의 관계가 조금 더 깊어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고 "조금 더 진해진 거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2일 후면 이 비현실 같은 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게 걱정이 앞섰지만 오늘을 마무리해야 내일도 시작할 수 있었기에 레온의 중국마트에서 구매해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짊어지고 왔던 라면을 끓여 먹고 알베르게에 남아있던 쌀을 이용해서 라면죽까지 배불리 먹은 뒤에 하루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