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미술관이야기 두번째 책 집필하기
#프라도미술관 #프라도미술관이야기 두번째 책 집필하기
1. 루시타니아의 대장, 비리아투스의 죽음
The Death of Viriatus, Chief of the Lusitanians
1807. Oil on canvas. Room 064
JOSÉ DE MADRAZO Y AGUDO, 1781-1859
신고전주의 방식을 통했기에 마치 하나의 조각품을 보고 있는 듯한 선명함과 그 공간감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프랑스의 스페인 침략에 대해 많은 아픔을 겪고 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과거 기원전 스페인 북부의 루시타니아 왕국의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지쳐가던 스페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댕겼다.
물론, 고야의 1808년 5월 3일도 그 의미를 다하고는 있지만, 비리아투스라는 인물은 전설적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를 로마가 점령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이 루시타니아 왕국은 무려 200년 가까이 저항의 힘을 키웠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1814년 그려진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함께 스페인 국민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울분을 토해내게 만들어 영국의 웰링턴 장군과 연합하여 나폴레옹을 무찌르게 되었다.
고야의 그림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저항하며 싸워가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마드라조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지도자의 꿈만으로는 절대 세상이 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림 오른편에 나가는 3명의 사람 아우닥스(Audax), 디탈콘(Ditalkon), 미누루스(Minurus)가 바로 믿었던 심복이자 친구였지만, 끝내 비리아투스를 암살했던 배신자였기 때문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말 믿기 싫은 말이면서도 현실 속에서는 이 우울한 단어에 익숙해져 버린 세상이 되었다. 과거나 현재에까지, 하지만 미래에는 좀 달라질까? 그래서 이 그림 앞에 서면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 함께 하는 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다시금 기대해보면서도 어리석은 짓은 아닐까? 하고 반문하게 되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속내는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1807년에 그려진 마드라조의 비리아투스의 죽음은 스페인에 침략한 프랑스의 모습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누워있는 비리아투스의 모습과도 같았다. 과거 화려하고 놀라운 해양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던 스페인에 닥친 작금의 현실은 너무나 비굴할 정도였다. 그 누구도 프랑스 나폴레옹의 잔혹함에 대항하려 하지 않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따르기에 급급했던 상황 속에 마드라조의 이 그림은 저항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작품이다.
비리아투스의 죽음을 바라보던 수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다시 찾고자 하는 나라 회복의 열정이 불타올랐고, 과거 아랍의 치하에서 800년 만의 재탈환에 성공했던 레콘키스타의 후예임을 깨달았기에 프랑스의 강압적 정책에 대항해 1808년 5월 2일 프랑스에 저항하였다.
그래서 이 그림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의미는 바로 그 시대의 배경이 된 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 고야의 그림과 마주 배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의 묘한 매력을 큐레이터의 손길을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은 연관성으로 이어진 작품들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 배경을 받아들여 작품의 깊은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마드라조의 저항을 통해 스페인이 뭉쳤고, 고야의 외침을 통해 하나가 되어 스스로 나라를 되찾은 것처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마음속 불만과 억울함을 토로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세계 모든 정치사나 경제사를 들여다보면 우울함이 많이 남는다. 합력이라는 단어보다는 이용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는 요즘 세상 속에 마드라조의 비리아투스 그림 앞에 서면 왠지 모를 서글픔과 눈물이 두 눈가에 흐르게 된다.
마드라조는 참담함과 비통함을 오히려 화려한 색상과 신고전주의적 섬세함을 사용하여 반어법적인 동기부여의 기능을 그림 속에 드러냈음을 본다. 슬픔과 아픔을 오히려 세련되고 화려하게 묘사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에 큰 작용을 하는 마드라조의 이 작품을 보면서 문득 하나의 글이 떠오른다.
인생의 깊이는
흔적으로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오늘을
누릴 줄 모른다면
그것이
고통이든
어려움이든
슬픔이든
환희이든
열광이든
받아들임의 몫이다.
그런데
누리기보다는
이용하려 하고
함께 만들어가기보다는
극히
이기적인 발상으로
나만의 특별함을 외친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내 말 한 마디면…”이란
어이없는 소리를 들을 때
화가 나는 것보다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아… 저 사람은 아직도 못 벗어났구나.’
이 생각이 밀려 나오기에…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 채
편견과 선입견으로
관계를 정의하고 시작하면
결국,
쓰디쓴 헤프닝만 벌어짐을 모른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나를 위해 내어준
귀한 자임을 잊은 채 말이다.
@namu.art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