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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쿰척 Aug 27. 2021

#21. 의자, 그게 뭐라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됐냐!

오늘 밤은 잠자리도 뒤숭숭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아니다. 오늘도 출근하는 날이어서 그런 거다. 만병의 원인은 출근이니까. 오늘도 회사에는 8시 30분에 도착하였지만, 괜히 편의점도 들러보고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사들고 52분에 출근하였다. 


오늘은 유난히 실장님이 기분 좋아 보이시는 날이었다. 이사진이 단체로 연가를 쓰는 바람에 실장님이 존재감을 뿜 뿜 하고 계셨다. 평소 같으면 건수 잡아서 점심 회식이라고 하러 가자고 하실 테지만 오늘도 코로나 덕분에 회식은 면했다. 


실장님은 오전 내내 자리에 안 계셨다. 여기저기 부서 투어를 하시는 건지 자리에 앉아 계시는 걸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실장님도 어린이날인가 보다. 덕분에 우리도 어린이날을 즐길 수 있었다. 실장님이 점심시간 즈음에 눈웃음을 지으시며 돌아오셨다. 덜컹덜컹 소리를 내면서 오시더니 두 손에 시디즈 의자 두 개를 손수 끌고 오시는 것이다. 

> 아니 저기서 남는다고 해서 얼른 주워왔어요. 이거 시디즈 꺼 이번에 나온 건데 엄청 비싼 건가 봐. 한 번 써오려고. 아! 의자 하나 남네.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랑 어린 사람이 하나씩 쓰면 되겠네~ 서현 씨. 이거 하나 써요.

>> 네! 감사합니다.


이럴 때 막내가 좋다. 평소에는 잡일 투성이지만 가끔씩 막내의 특혜를 누릴 때가 있다. 그게 오늘이었다. 잠자리가 뒤숭숭한 게 길조였나. 난 신나게 의자를 옮겼다. 앉아보니 다르긴 달랐다. 커블이 따로 필요 없는 의자였다. 허리도 잘 받쳐주고 자세도 저절로 바르게 앉게 되었다. 특히, 이 과장님이 부러워하였다. 그는 회사 돈으로 모든 걸 하고 싶어 하시는데, 남이 누리면 매우 배 아파했다. 

> 서현 씨~ 부럽다. 나 한 번 앉아봐도 돼?

>> 네. 그럼요. 과장님

> 이거 너무 좋다. 이런 건 얼마쯤 하려나?

>> 그러게요. 좋은 것 같아요.

> 부럽네 서현 씨.


왠지 쌤통 같았다. 실장님이 웬일로 나한테 이런 행운을 줬는지 나한테도 이런 일이 있구나~ 싶었다. 좋은 의자에 앉으니 괜히 기분도 좋아졌고, 일도 더 잘되는 느낌이었다. 회사 사람들한테 티는 내지 않았지만,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이런 걸로 보급해줘야지 회사가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록 부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의자에 한 번씩 앉아보는 게 귀찮았지만, 귀찮음을 감수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회사에는 절대 내 돈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지만, 이제 무선 키보드와 무선 마우스도 갖고 싶어졌다. 


그렇게 행복한 일주일이 지나갔다. 또다시 월요일이 돌아왔다. 월요병 때문인지 이제 좋은 의자에 대한 기대도 별로 들지 않았다. 또 로봇처럼 출근해서 52분에 자리에 앉았다. 뭔가 힘들었다. 벌써 의자 약빨이 떨어진 것 같았다. 뭔가 전처럼 몸이 편하지 않았다. 월요병이 이렇게나 무섭다는 걸 실감했다. 그렇게 오전에 일을 집중해서 하고 있는데 이 과장님이 시비를 걸었다.

> 서현 씨. 일은 잘하고 있지? 별일 없고?

>> 네. 그럼요.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이다. 그러고 일에 또 집중하고 있는데, 뭔가 의자 높낮이가 달라졌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의자를 살펴보는데 실장님이 주신 의자가 아니었다. 주말 사이에 누가 내 의자를 바꾼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의심된 사람은 이 과장님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유독 내 의자를 탐냈고, 시착도 해보셨다. 더군다나 오늘 나한테 굳이 말을 거셨다. 또, 그는 초과수당을 위해 매주 출근하기도 하였다. 합리적이지만, 생사람 잡기는 싫어서 아직 화내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 슬며시 사무실을 돌아보면서 범인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범인을 찾는 것은 점심보다 중요했다. 점심은 나중에 대충 샌드위치를 사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에 아무도 모르게 사무실에 사람들 자리를 돌아다녔다. 사실 1주일밖에 앉아보지 않아서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보면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둘러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과장님의 의자가 다른 분들과는 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장님 의자와 비교해봤더니 똑같은 거였다. 

"잡았다 요놈!"


어떻게 돌려받을까 고민하다가, 사무실에서 의자가 바뀐 걸 공표하기로 하였다, 그럼 범인이 무슨 반응이라도 하겠지. 최소한의 양심을 믿어보기로 하였다.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거듭 한 숨을 쉬었다.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뭔가 제 의자 바뀐 것 같아요. 그때 실장님이 좋은 걸로 바꿔주셨는데, 주말 사이에 뭔가 달라졌어요!

안 그래도 심심했던 주변 사람들이 재밌는 건수를 물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다들 한 목소리로, "그러게 서현 씨. 우리 거랑 똑같은 건데? 이상하다."라며 불을 지펴 주었다. 

파워 오지랖이 이럴 때 쓸모가 있구나 하면서 이 과장님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맞다! 서현 씨. 내가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내가 주말에 출근했는데, 서현 씨 의자가 너무 좋아 보여서 서현 씨 의자랑 바꿨어. 다시 도로 바꿔놓는다는 걸 까먹었네. 미안. 지금은 근무 중이니까 이따 퇴근하고 내가 바꿔놓을게요.

> 아! 네. 알겠습니다!


이제는 창피해서라도 도로 돌려놓을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 그냥 쓰라고 할까도 생각해봤겠지만, 이 과장님한테는 절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기적으로 보여도 내 껀 꼭 챙기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서 퇴근할 때가 되었다. 내일은 내 의자를 되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로 퇴근하였다.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하였다. 뭔가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자리에 앉는데, 여전히 편안한 느낌이 없었다. 의자가 그대로였다. 이제는 말하기도 민망했다. 의자가 그렇게 탐났나 그냥 아무 소리 말까 생각이 들다가도 어이가 없어서 짜증 났다. 나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돌려놓을 것 같은데.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과장님이 먼저 말 걸어주시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내 눈을 피하거나 마주쳐도 별 말하지 않았다. 양심도 없는 사람. 


이제는 내가 먼저 말을 걸어봐야겠다 생각했다. 이 과장님이 화장실 가시는 것 같길래 따라 나갔다. 

> 과장님. 혹시 제 의자... 바꾸는 거 잊어버리셨죠~?

>> 아 맞다. 그래. 잊어버렸네. 아 근데 의자 너무 좋더라. 나 요즘 허리가 안 좋거든. 그거 그냥 내가 쓰면 되나? 서현 씨는 젊잖아. 젊은데 왜 욕심을 내. 나중에 서현 씨가 내 나이 되면 내가 줄게. 

> 그래도. 실장님이 주신 건데...

>> 서현 씨. 난 이만 화장실 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저 멀리 가있었다. 내가 입사이래 거의 처음으로 누려본 막내 특혜였는데, 이걸 이렇게 낚아채가다니. 정말 궁상맞고 얄미웠다. 자리에 돌아와서 시디즈 의자를 검색해보았다. 보란 듯이 하나 살까 고민해보았다. 그러다가 나의 신용카드가 이제 그만 좀 쓰라고 울부짖는 걸 보며 의자는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되지"라고 단념하였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났다. 이 과장님은 새 의자로 만족스러운 회사생활을 하셨고, 난 다시 커블과 함께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대리가 내 의자를 보면서 한 마디 하였다.

> 서현 씨. 서현 씨 의자 그 고급 아니었나?

>> 아. 그게...

라고 말을 흐리자, 저 멀리서 이 과장님이 소머즈처럼 대화를 듣고 큰 소리로 말했다. 

>>> 아, 의자~ 서현 씨가 나 힘들어 보인다고 바꿔줬어. 난 그냥 괜찮다고 사양하는데도 굳이 바꿔주더라고.


머쓱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대사가 떠올랐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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