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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쿰척 Aug 31. 2021

#22. 그녀 혼자 자율 출퇴근제

업무시간은 우리 모두가 9시부터 6시 아닌가요?

회사 생활에도 시즌이라는 게 있다. 유달리 바쁜 한 주가 있고, 한가롭게 전화만 받다가 가는 나날들도 있다. 오늘은 후자였다. 딱히 급하게 할 일이 없었고, 전화만 잘 받고 요청 오는 것들만 해결하면 되는 여유로운 날이었다. 


한가하다 보니 막내의 일 중 하나인 "전화 당겨 받기"를 주 업무로 수행하였지만, 그래도 평화로웠다. 오늘 내가 제일 많이 한 말은 "메시지 남겨드리겠습니다."였다. 이렇게 한가로운 나날들은 절말 드물기 때문에 이럴 때는 누려야 한다. 오늘은 괜스레 신이 났다. 여유롭게 뉴스도 보고 사내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런저런 소식들도 접했다. 아래층에 나보다 한 살 어린 직원분이 결혼을 한다는 뉴스도 봤다. 왜 결혼을 하는 것까지 사내 홈페이지에 공개되는 건가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잊고 다른 사내 장터에서 살만한 게 있나 검색하였다. 


일이 별로 없을 때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천천히 갔다. 네시쯤 되었나 했는데 아직 두 시 반이었다. 뭘 해야 남은 시간을 알차게 보낼까 고민하던 찰나에 전화가 울렸다. 저 멀리 김 팀장님의 전화 벨소리였다. 김 팀장님의 전화는 유난히 까랑까랑했다.


김 팀장 :  78년생, 여, 기혼, 고등학생 아들 하나, 중학생 아들 하나, 초등학생 딸 하나, 명품러.


딱히 근처에 전화받을 사람이 없어 보여서 벨소리가 세 번째 울리기 전에 얼른 전화를 당겨 받았다.

> 대신 받았습니다. 강서현입니다. 

>> 서현 씨, 나 마케팅실장인데요. 김 팀장은 어디 갔나요? 

> 자리 비우신 것 같습니다. 메시지 남겨드리겠습니다.

>> 아니, 내가 오전 내내 전화했는데 당겨 받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메시지를 남긴다고?

     아니 너네는 왜 전화도 안 당겨 받는 거야. 알겠어. 

> 네..


난 그저 전화를 당겨 받았을 뿐인데 괜히 욕을 먹었다. 오전 내내 전화를 하셨다는데, 오전에 전화 벨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특히나 김 팀장님의 전화 벨소리는 다른 것들과는 달라서 쉽게 들리는 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케팅실장님이 착각을 하셨겠거니 하였지만, 기분이 나빴다. 김 팀장님한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메신저를 켜보니 자리비움 5시간이었다. 출근하고 바로 출장을 가신 건가. 김 팀장님네 유경 씨에게 물어봤다.


> 유경 씨~~~ 혹시 김 팀장님 어디 가셨어요?

>> 아. 진짜 서현 씨. 대박이예요. 아까 9시 반에 출근하자마자 ㄱㅌㅈ 가방 들고나갔거든요? 근데 아직도 안 들어와요. 심지어 저한테는 회의가 신다고 하셨거든요. 정 팀장님 지금 회의실에서 회의 중이거든요. 거기 간다고 하셨는데, 거기도 안 갔대요. 대박이죠.

>> 아 그리고, 정대리님이 카톡 왔는데, 이 회의 이사님 들어오시는 회의였거든요. 실장님은 다른 회의 있어서 못 오시고 김 팀장님이 대리 참석하시는 거였는데 안 오셔서 이사님이 한 마디 했다네요. 괜히 정대리님만 찍혔나 봐요. 회의 제대로 준비 안 한다고. 

> 대박이네요 진짜. 아니 근데 유경 씨. 마케팅실장님이 전화 왔는데, 전화 왜 오전 내내 안 받냐고 왜 안 당겨 받냐고 뭐라고 하셨어요. 그건 뭐지. 착각하신 걸까요?

>> 아 안 그래도 오전 내내 전화가 안 울렸거든요? 근데 저도 그 전화받아서 전화기 봐보니까. 소리 꺼놓은 거 있죠. 김 팀장님 아예 작정을 하고 집에 가셨나 봐요. 그래서 욕먹기 싫어서 제가 전화 벨소리 다시 켜놨어요.


유경 씨는 봇물 터지듯 나한테 김 팀장에 대한 화풀이를 했다. 김 팀장이 자리를 자주 비우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부와 줄타기로 그녀는 지금 팀장 자리까지 성장하였다. 그녀는 이례적인 고속승진의 대상자였다. 모두들 그녀가 근무태만인 걸 알지만,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 윗사람들을 어떻게 구워삶는지 당해본 사람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그녀를 욕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날 회사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가 어디에 간 줄 모르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실장님도 그녀가 없는 걸 알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 얄미웠다. 상급자가 당연히 저지해야 할 행동인데,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니. 나 같은 막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냥 이유 없이 혼나야 했다. 


김 팀장님처럼 회사생활을 하면 어떨까. 한 편으로는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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