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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무진븐니씨 Sep 17. 2021

<늑대아이>와 디아스포라(Diaspora)

송블리의 키워드 영화 읽기 l 반 인간, 반 늑대 이야기 일본 애니메이션

■키워드: 디아스포라, 흩어짐



늑대아이와 디아스포라 l 다른 정체성으로 인한 엄마의 이주


뭘 할 때가 제일 즐거워?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해?

지금까지 어떤 여자를 좋아했어?


-영화 <늑대아이> 中-


영화 속 엄마 (はな)는 대학시절,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마주한 그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한다. "뭘 할 때가 즐거워?",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해?", "지금까지 어떤 여자를 좋아했어?" 한 사람이 좋아지면 떠오르는 질문들이다. 그렇게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늑대인간이었다. 100년 전, 늑대인간의 후예로 살아가는 늑대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는 영화의 설정에서 이는 어떤 문화에 금기시된 타부를 갖고 살아가는, 혹은 이주를 해야 하는 '디아스포라'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였다.


처음 '하나'라는 여자는 그 늑대인간의 모습을 보고 도망치지 않는다. 정체를 알고도 변하지 않고 남편, 늑대 인간과 사랑을 나누며 '유키'와 '아메'라는 반 인간, 반 늑대의 자녀를 낳는다. 엄마는 인간이고, 아빠는 늑대인 그들의 정체성에서 유키와 아메는 늑대임을 들키지 않고 인간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엄만 그 둘에게 부탁한다. 인간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나갈 것과 아무 상황에서나 늑대로 변하지 말 것을. 그렇게 유키는 늘 주문을 외운다. '선물 세 개, 문어 세 마리'. 자신이 행복할 때, 정체성을 지키고 싶을 때, 늑대로 변신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주문으로 보였다.

<영화 늑대아이 스틸컷>

늑대인간: 어째서 하나라고 불려?

하나: 내가 태어났을 때 뒤뜰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대

심은 게 아니라 저절로 피어난 코스모스


-영화 <늑대아이> 中-


한편, 첫째 유키와는 다르게 둘째 아메는 계속적으로 자연생활을 추구한다. '늑대'로서의 정체성을 확장시키려는 움직임으로 보였다. 자주 자연에 나가고, 그를 가르칠 스승을 찾는다. 엄마는 그런 늑대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아메가 유키보다 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메가 집을 나간 날, 그 비 오는 산속을 거닐며 늑대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아메를 찾아 나선다. 엄마 하나의 너무 과한 걱정이었을까? 꿈속에서 아메의 아버지이자, 하나의 남편인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스로 가야 할 곳에서 가게 된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고.


그렇게 하나는 유키와 아메라는 두 남매를 지키기 위하여 큰 소음이 나는 아파트에서 시골 전경의 집으로 이사를 한다. 남매를 위한 이주 아닌 이주를 하게 된 것. 그곳에서 농경을 하며,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들고 자연의 이치와 자식들을 키워가는 하나의 모습을 보니, 정말 코스모스를 닮은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저절로 피어난 코스모스를 보며 하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따뜻한 가르침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자라난 유키와 아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읽었던 한 책이 떠올랐다.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의 갈등 l <늑대아이>와 닮은 점


「프랑스의 문화전쟁」이라는 책을 보면 영화 <늑대아이>에서 나오는 정체성이 다른 이들, 다른 문화권의 역사를 가진 무슬림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프랑스와 무슬림의 관계 및 ‘히잡 사건’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갈등이 그려진 책의 내용이 떠오른 건 영화 속 '늑대인간'의 설정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사회와 늑대라는 정체성에서 자신에게 동물의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전학생과 싸운 첫째 유키를 보며, 자연에서의 늑대로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아들 '아메'를 보면서 다른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영화 <늑대아이>에서 인간의 문화권과 자연세계의 문화권에서 긴장상태에 놓인 유키와 아메와 닮아있는 도서 「프랑스의 문화전쟁」. 이 책을 읽으면 과연 무엇이 두 집단을 이렇게 첨예한 긴장상태에 놓이게 하였는지, 왜 두 집단은 쉽사리 융화되고 동화될 수 없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또한 문화적 다양성의 인정은 또 다른 폭력과 억압을 낳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도 한다. ‘프랑스’라는 국가는 톨레랑스의 나라,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이 창시된 나라 아니던가?


톨레랑스의 이념을 중시하는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에 의아함이 들기도 하였다. 물론, 프랑스가 톨레랑스의 가면을 들고 종교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정교분리 원리에 입각한 공화국 사회의 달성, 공동체주의 출현의 방지를 위하여 학교에서의 히잡 착용을 ‘tchador’라는 용어로 지칭하며 이들을 선동하는 이슬람주의자까지 보는 시각에 조금 놀란 것이다.


 프랑스 내에서 ‘히잡’ 착용은 프랑스인의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반대적 심리가 결부되어 2004년 3월 15일 종교적 상징물 착용 금지법으로 제정되기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정교분리에 입각한 공화국의 세속화라는 명분으로는 설명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으며,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와의 역사적 상황을 미루어보아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한 정서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 사회 내에서 인종과 종교, 원리와 이념 및 사상이 결부된 문제는 심각한 갈등을 낳게 마련이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룬 프랑스와 이슬람의 문제는 프랑스 공화국의 이러한 단호함과 무슬림의 종교적 성격이 단순한 대립 및 반목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 마음이 아프다. 이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과 정체성 확립 문제와 연관성이 있는 '광의의 범위'의 문화적 전쟁이었다. 유럽 세계와 이슬람의 문제가 단순한 갈등이 아닌,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바탕으로 전개된 문화적 충돌이라는 점. 안타깝다.


프랑스에서 무슬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원인 중 한 가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민의 성격이 노동 이민에서 정착 이민으로 바뀐 것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프랑스와 프랑스 내의 거주하는 이주민들의 제2세대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문화권 안에서 ‘히잡 착용’이 비교적 널리 퍼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프랑스 공화국과 이슬람의 문화권의 갈등을 읽어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고 계속적으로 영화 <늑대아이>의 맥락과 상황이 겹쳐지는 부분들에 마음이 싱숭생숭하였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아이 포스터>

정체성과 문화권 l 늑대아이, 프랑스의 문화전쟁, 자이니치, 한일관계


 「프랑스의 문화전쟁」이라는 책은 영화 <늑대아이>에서 늑대인간의 자녀들이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선물 세 개,  문어 세 마리'를 계속 주문으로 외우며 늑대인간으로 변하지 않으려는 유키의 모습이 많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늑대의 모습에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산속에 들어가 훈련을 받으며 '늑대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아메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 책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인간과는 다른 존재인 늑대 인간의 '자녀'의 모습을 통하여 '차이'에 따른 다름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듯했다.


영화 속에서,  책 속에서 이렇게 디아스포라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보면 역사와 문화, 정체성과 전통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모양과 문화는 시간이 흘러도 지속되는 갈등의 씨앗이라는 것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갈등과 차이에 따른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다. 흩어진 채 살아야 했던, 혹은 흩어진 채 살아가며 삶을 영위해야 했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기존의 문화와 대립적이고 반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만의 정체성과 자치를 확립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문제가 먼 나라의 이야기 같은가? 에 대한 논의를 하자면 그리 먼 나라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로 인하여 자이니치라고 명명하며 살아가는 존재와 그들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확장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문화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한일관계의 역사적 배경 역시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있다. 전쟁으로 호황을 누린 일본이 조선에서 노동자를 모집한 배경과 연관성에서 그들이 재일 조선인이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과거 양국은 잘 풀어나가야 하는 역사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관계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올바른 역사적 의식의 재고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 외교, 역사의 문제와 결부되어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엉켜버리곤 했다. 그러니, 나는 이제 문화적 교류와 함께 과거의 감정에 대한 해소와 균형을 모색해보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해보고 싶다. 그들이 우리의 음악과 문화를 현재 많이 사랑해주는 것 같이, 우리도 그들의 감각적이고 신선한 애니메이션과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그런 작은 태도를 함께 견지해보는 것이 얽힌 과거의 역사적 갈등을 푸는 첫 단추가 되지 않을까? 에 대한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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