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아픈 사람으로서 치료해야 한다는 감각과 이 질병을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어요. 저를 변화시키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저를) 수용하는 것, 둘 다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우울증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정상인 줄 알았다. 아니, 어렸을 때부터 나는 스스로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왜? 진단을 받지 않아도 느껴지는 싸한 감각 같은 게 있다. 아니,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자기 검열일지도 모른다. 음. 나는 좀 이상한 애였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거의 나지 않지만 큰 줄기는 기억한다. 아니, 큰 줄기를 떠올리다 보면 고구마 뿌리처럼 덩어리째 올라오는 사건이나 이름들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내게 발달장애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아마 가족들도 나랑 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급생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눌하게 말하고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겁도 많고 운동도 못하는 아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말이다. 발달장애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확실히 내가 정상이 아니란 걸 그들은 알고 있었으리라. 장애는 욕설이나 은어로 쓰일 만큼 가볍다가도 공사현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철근 더미보다 무겁다. 때문에 부모는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어도 병원에 한 번 데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확진이라는 건 일종의 낙인이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나는 낙인찍히는 게 별로 두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확진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우울증이 찾아오고 나서야 내원할 정도로 스스로의 정신건강에 무심했다. 그때는 우울증만 나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울증이 호전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렸을 때 느꼈던 '이상한' 감각이 다시 찾아왔다.
다행히도 왕따는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머릿속이 흐려졌고, 실수가 잦았다. 실수가 잦다 보니 불려 가는 경우도 많았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거나 두고 오는 경우도 빈번했다. 집에서 안경을 분실하고 몇 주 뒤에 찾은 적도 있다. (그 안경은 빨래통 속에 있었다.) 심지어 업무 도중에 휴대폰으로 SNS를 하다가 지적받은 적도 꽤 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이때 처음으로 각성제를 처방받았다. 페로스핀이라는 약을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약의 부작용은 생각 외로 독했다. 입마름에 구역질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처음 각성제를 처방받았을 때는 견디기 힘들었다. 처방받은 약을 다 복용하고 다시 내원하지 않았다. 병원을 자주 옮기던 시기였다.
새로 내원한 병원에서는 내 상태가 불안이 높기 때문에 각성제를 복용했을 때 불안이 두 배로 널뛰었을 거라고 진단했다. 그 후로는 각성제 대신 항불안제 위주로 처방을 받았다. 확실히 그때는 모든 게 불안정했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에 급급했다. 진로도 가치관도 흔들리기 쉬웠고, 남들보다 못한 내가 싫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수치심을 주는 가족과 사회가 싫었다. 내게 해가 되는 세상에서 혼자 안정감을 찾아야만 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나를 돕는 건 결국 나밖에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타인이 날 돕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병원도 여러 군데 옮기고 비싼 상담비를 내는 대신 상담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다. 내 다리에 직접 붕대를 감고 내 팔에 직접 주사기를 꽂아 넣으며 살아왔다. 이 삶이 지긋지긋하고 환멸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 불안장애, 성인 ADHD, 강박증. 이러한 진단명이 나의 모든 걸 말해주진 않겠지만 내 일부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가족과 사회는 내 투병 기록을 들어내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이걸 들어낸다면 나는 무엇이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