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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Jun 03. 2023

2차시도 재산탕진

오늘이 낯선 지구 여행자입니다만 ep6

  몇 주간의 치밀한 계획이 오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중3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날이던 그날은 7월 중순의 무덥고 습한 공기로 아침부터 땀이 흘러내렸다. 변함없이 끈을 길게 늘어뜨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섰다. 가장 친한 친구 J만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8시 40분쯤 조회를 마치자, 난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서둘러 학교를 벗어났다. 가방이 없어지면 집으로 연락이 갈까 봐 J에게 뒤처리를 부탁했다. 나는 화장실에 간 것으로 말을 맞췄다. 점퍼 안주머니를 만져봤다. 통장과 도장이 만져졌다. 서둘러 은행으로 향했다. 


  조금 일찍 왔다. 은행 문이 열리려면 5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길엔 제법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다. 아는 사람을 만날 것만 같다. 반대편 골목 안으로 최대한 몸을 숨겼다. 9시 정각. 정확히 은행 문이 열렸다.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꽤 있었는지 많은 수의 사람이 순식간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통장이 없어진 걸 알게 된 엄마가 화난 모습으로 은행 현관으로 뛰어 들어올 것만 같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출금표를 작성했다. 손에 땀이 났다.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아냈다. ‘금₩400,000원정’. 통장에 있는 전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돈이 우리 집에 남은 현금의 전부인 걸 몰랐다. 


  나일론 재질의 싸구려 반지갑에 넣기엔 돈이 너무 많았다. 억지로 넣고 접으니, 주머니에 간신히 들어갔다. 부자가 됐다. 뭐든 다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장에 나이키 운동화를 사러 갔다. 진열대에 있는 신발들을 하나하나 들어보고 살폈다. 사장님께서 새로 나온 제품이라며 보여주신 운동화가 맘에 들었다. 샀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돈은 나에게 막강한 힘을 안겨줬다. 이번엔 옷이다. 신촌에 있는 백화점으로 가서 리바이스 청바지와 청재킷을 샀다. 너무 사고 싶었던 옷이라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선택이었다. 장마를 앞둔 7월 중순의 날씨에 청재킷을 산 거다. 


  가진 돈의 절반이 줄었다. 덕분에 지갑이 잘 접혔다. 이때까지 난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세뱃돈과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도 모두 엄마에게 맡겨졌다. 아니 빼앗겼다.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참는 법만 배웠다. 10살 때부터 사주겠다는 자전거는 결국 내 나이 마흔에 내가 나에게 선물했다. 어떻게 현명한 소비를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1차시도 실패를 경험 삼아 잠자리 선택에 신중했다. 일찍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던 친구가 신분증 검사도 없고 값이 싼 여인숙을 소개해 줬다. 하룻밤 단돈 오천 원이었다. 모래내에 있던 그곳은 옛날 집을 개조해 영업하는 곳이었다. 좁은 복도에 일정한 간격으로 미닫이문이 하나씩 있었다. 주인 할머니의 안내로 들어간 방은 두 사람이 눕기엔 비좁은 작은 방이었다. 


  다음날 버스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유람선이 타고 싶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를 준비하면서 한강에 유람선이 다니기 시작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승선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부족한 금액은 내가 내주었다. 아직은 부자였다. 전철을 타고 지날 때나 보던 한강이었다. 그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유람선 뱃머리에 서면 불어오는 강바람 덕분에 시원했다. 마음속 응어리마저 날려버릴 듯했다. 배는 여의도를 출발해서 노들섬을 지나 여러 다리를 거쳐 갔다. 유람선의 운항을 위해 아치형으로 공사를 한 잠수교를 지날 때면 꼭 부딪힐 것만 같았다. 


  다시 모래내로 왔다. 완벽한 이틀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랬다. 버스에서 내려 걷던 난 눈앞이 깜깜해지고 하늘이 노랗게 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지갑이 없어졌다. 큰일이다. 없어진 돈도 아까웠고 당장 오늘 밤도 문제였다. 다행히 주머니에는 유람선 승선표를 사고 남은 잔돈들이 대충 접힌 채로 남아있었다. 어제까지 부자였던 나는 하루 만에 거지가 됐다. 어제 갔던 여인숙 방안에 혼자 누워있는데 암담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꾸깃꾸깃한 돈을 하나하나 펴봤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맘에 문고리가 잠긴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야 잠이 들었다. 


  다행히 방학 기간이라 친구들의 도움으로 며칠은 버텼다. 더 이상 재워줄 친구가 없다. 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밤이 되면 하염없이 걸었다. 간판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가게들의 셔터가 내려가면 슬금슬금 거리로 나와 배회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길 기다렸다가 후미진 건물 계단을 찾아내 잠을 청했다. 연탄은 없었지만, 작년의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었다. 길에서 자는 노숙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 친구가 나에게 엄마가 학교로 찾아왔다고 말해줬다. 나와 연락이 될 만한 친구들에게 울면서 부탁했다고 한다. 마음이 흔들렸다. 


  일주일이 조금 넘은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꾀죄죄한 모습이라 지나는 길에 상가 화장실에서 대충 고양이 세수를 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겁이 났다. 가고 싶기도 하고 가기 싫기도 했다. 골목을 돌아서자, 엄마는 현관에서 집 나간 아들을 울며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남아있던 돈을 전부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말이다. 잘 돌아왔다는 말에 나 역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죄송했다.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집에 돌아온 이후 며칠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때 혼이 나고 혼이 나야 할 때 보듬어 주었던 엄마의 방식이다. 


  이는 나를 두고두고 괴롭히며 혼란스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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