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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Jun 20. 2023

저는 대표입니다

글쓴이의 덧붙임 혹은 변명 12


  ‘나도 편지를 쓰려고 하는 찰나 교관이 시범을 보이겠다며 내 옷과 포장지를 가져갔다. 멀뚱히 내 옷이 각 잡혀 포장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분명 포장지에서 내 편지를 찾아볼 텐데 큰일이다. 나중에 동생에게 듣기론 엄마가 밤새 울며 내 글씨를 찾고 또 찾았다고 한다.’ 

  - 논산행 열차는 매진입니다 中




  살아오면서 꽤 많이 겪은 일 중 하나가 ‘대표’였습니다. 

  ‘네가 대표로 발표해’라든가

  ‘네가 대표로 갔다 와’라든가

  ‘네가 대표로 맞자’ 등 수없이 많은 ‘대표’를 했습니다. 


  입대한 첫날 제 옷은 동기들의 대표가 되어 교관의 손에 의해 멀끔히 포장됐죠. 그 시절 포장지 안쪽에 엄마에게 편지를 남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의 사촌 형도 그랬습니다. 형의 편지 한 줄을 보며 밤새 울었던 이모의 이야기를 저에게 하신 엄마의 목적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인생에 그런 일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봅니다. 결국 전 편지를 남기지 못했고 엄마는 다른 이유로 밤새 우셨죠. 


  어린 시절엔 앞에 선다는 것이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장남이라 가족을 대표했고 학교에선 반장으로서 학급을 대표했습니다. 동창 모임을 대표하는 회장이기도 했죠. 항상 앞장서서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신나고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앞에 선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책임을 져야 했고 다양한 이견들을 조율해야 했습니다. 점점 저는 없어지고 대표라는 자리가 절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뱉어낸 한마디가 큰 파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엔 결정한다는 것이 더 두려워집니다. 내가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이 저를 짓누릅니다. 공평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부담이 오히려 저의 결정을 늦추고 우유부단함을 만들어 냅니다. 본래 까탈스러운 성격이 더욱 날카롭고 예민해집니다. 가끔은 압박감에 엉뚱한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갈수록 ‘성격이 더러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뭔가를 대표하는 것에 손사래를 치고 있었습니다. 물 흐르듯 살고 싶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렇게 사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며 살다 보니 뭔가 허전함에 휩싸였습니다. 그 허전함이 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문득 사는 대로 생각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협소한 생각의 폭과 깊이에 당황합니다. '이건 내가 아는 내가 아닌데….'


  다시 ‘대표’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제 인생의 ‘대표’로 말입니다. 앞장서는 것이 자랑스럽고 신났던 어린 시절 저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글을 통해 저를 솔직히 고백하고 자아 성찰에 노력하려 합니다. 글쓰기가 만들어 내는 마법이 제가 원래 있어야 할 삶의 자리로 데려가 주길 바랍니다. 훗날 돌아봤을 때 저의 글이 증거가 되고 흔적이 되어 잘살아 왔음을 증언해 주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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