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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May 23. 2023

아빠는 처음이라

오늘이 낯선 지구 여행자입니다만 ep13

  모처럼 셋이 모였다. 성인이 된 아이들과 시간을 맞춰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역시 힘들다. 평소에 먹고 싶었던 토마호크 스테이크용 고기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두께가 7cm에 달했다. 냉장실에서 3일 동안 천천히 해동을 했다. 유튜브에서 본 것처럼 키친타월로 핏물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요리용 장갑을 끼고 올리브유를 구석구석 발랐다. 고기에서 올리브 향이 났다. 요리사들이 쓴다는 유명 소금을 사서 골고루 뿌렸다. 마치 내가 TV에 나오는 요리사처럼 한 손을 높이 들고 뿌려봤다. 집엔 나 혼자였다. 웃음이 났다. 소금이 고기 주위로 마구 흩어졌다. 냉장고에 잠시 넣어두고 같이 먹을 버섯과 마늘을 손질하고 감자를 으깼다. 한번 삶은 감자를 짓이기며 생각했다. 사서 먹자. 


  아이 둘과 나. 셋이 살기 시작하면서 근무 시간을 조정해야 했다. 가장 먼저 잠을 조금 줄였다. 문제는 음식이었다. 매번 볶음밥과 라면을 먹일 순 없었다. 내가 요리를 해보기로 했다. 미역국이 시작이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콩나물국 등 하나씩 해낼 때마다 나 자신이 기특했다. 만들 수 있는 반찬의 종류가 하나씩 늘자, 조리도구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충동적으로 독일제 비싼 프라이팬도 샀다. 주방에 있는 시간이 늘어 갈수록 해보고 싶은 요리도 늘어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비프립. 흔히 LA갈비로 알고 있는 갈빗대 부위를 통째로 오븐이나 바비큐 그릴에 간단히(?) 요리하면 된다. 그저 8시간이라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토마호크-긴뼈에 붙은 고깃덩이가 인디언이 사용하던 무기를 닮아 붙여진 이름. 등심과 갈빗살, 새우살을 모두 맛볼 수 있다-덩어리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리버스 시어링’ 방식으로 조리할 거라 오븐의 그릴 판을 꺼내 고기를 올렸다. 하마터면 커다란 뼈대 때문에 들어가지 않을 뻔했다. 심부 온도계를 고기 가운데에 조심히 찔러 넣고 오븐 문을 닫았다. 심부 온도계는 56도에 오븐은 105도에 맞췄다. 집에 있는 전기오븐은 최대 90분까지 타이머가 되어 있어서 불편했다. 어떤 요리 유튜버도 이 부분이 불편하다고 했다. 매우 공감한다. 이제 익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난 칭찬에 약하다. 누가 잘한다고 말해주면 더 열심히 한다. 초등학교 5학년쯤이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 과목 100점이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1개가 틀린 것이었다. 이상했다. 분명 난 모두 정답인데. 채점된 시험지를 돌려받고 나서야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문 위에 있던 문제를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눈물이 핑 돌았다. 실수한 것보다 엄마에게 혼이 날 것이 무서웠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시험 결과를 얘기했다. 내 예상이 적중했다. 1개 빼고 모두 정답은 소용없었다. 난 형편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때 엄마가 나를 괜찮다고 위로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실수할 수 있다고 다음부터 더 신중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날 이후로 난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식탁 위 노란색 전구 빛으로 인해 물기 없이 깔끔하게 닦인 와인잔 윗부분이 반짝인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 품종의 붉고 짙은 보라색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양송이버섯과 잘 구워진 마늘을 덜어 아이들의 접시에 나눠주고 힘들게 만든 으깬 감자요리를 큰 볼에 꺼내 놓았다. 각자 먹을 만큼 가져갔다. 식탁 한가운데에 있는 토마호크 스테이크의 모양은 압도적이었다. 딸과 아들은 휴대전화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긴뼈를 잡고 조심스럽게 단면을 잘랐다. 뼈와 살이 분리되고 등심과 갈빗살이 떨어져 나왔다. 새우살은 마지막에 맛보라 했다. 기름지고 부드러운 새우살을 먼저 먹으면 다른 부위가 맛없게 느껴진다. ‘우와! 맛있다!’를 연발하는 아이들의 표정 속에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있었다. 나에게 더없는 칭찬이다. 이 순간 너무 행복하다. 


  온전한 가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안정과 행복을 선물하고 싶었다. 이혼한 지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다. 더 잘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공백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들의 와인잔이 가장 먼저 비워졌다. 잔에 와인을 채워주며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빠도 너희처럼 이 세상을 처음 살아본다 고백했다. 조금 더 살아봤을 뿐 나 역시 오늘이 처음이다. 그래도 부족한 아빠의 딸로,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얘들아! 이해해 줘. 아빠도 초보라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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