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노란, 잎, 초록, 열매, 빨간... 일상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존재. 우리는 그것을 하나로 뭉뚱그려 ‘식물’이라 부른다. 무심코 지나치며 눈여겨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만 식물이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기능적으로 따지자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나에게 단연 ‘꽃’은 식물이 만들어 낸 최고의 마법이다.
꽃이 처음 내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노란 수선화였다. 그 꽃은 플라스틱 포트에 담겨 창문 앞 조금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만가만 소리 없이 햇빛을 흡수하고 물을 삼키며며 예의 그 나팔 같은 작은 꽃을 피워냈다. 나는 그 조용한 순간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육종기술의 발달 덕분인지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장하게 꽃을 피워낸 그 식물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아름다움 것을 바라보는 기쁨을 넘어 감동까지 느꼈던 것 같다. 가느다란 줄기 끝, 작은 봉우리에서 나온 꽃은 스스로 찢고 나온 봉우리가 무색할 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자라나 크고 완벽한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그날부터 나는 꽃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출처 Unsplash 공식 홈페이지
순수의 전조
월리엄 브레이크
한알의 모레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어느 새 봄이 성큼 다가왔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이던 메마른 나무도 새싹을 틔워낼 준비에 분주하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나는 그 분주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반들거리는 잎과 나플 거리는 꽃으로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덩달아 나도 분주해진다. 우리들의 일상도 결국 자연의 시계에 맞춰져 있는 것뿐이니, 곧 기지개를 켤 나무를 따라 나도 내내 움츠렸던 몸을 펴본다.
나는 사실 나만의 정원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꽃과 나무를 가꾸고 해 질 녘 정원 한곁에 기대어 잠시 노을을 바라보는 삶은 생각만 해도, 꿈만 같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십 대의 나이에 산에 들어가겠다거나 시골 촌집을 구해서 살고 싶다는 말로 가족들을 당황시켰던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은 ‘위로’였고 아름다움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때 나는 조금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아직 세상에 제대로 나가 보지 않은 나이였으니 지레 겁을 먹은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미 마음 여기저기 새겨진 상처로 아파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의 보폭에 맞춰 세상으로 걸어 나가기에는 내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약해 빠졌다는 어른들의 다그침은 더 큰 상처가 되어 나를 오랫동안 대문간에서 서성거리게 만들었다. 저마다 각자의 삶이 있겠지만, 이십 년 전의 젊은이도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좌절하고 괴로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 듯 결국 직업도 갖고 결혼도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라고 이야기 전개되면 좋으련만 나는 사실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세상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한 채 산에 들어가는 대신 정원을 동경하며, 은둔의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결국 ‘꽃’을 선택했다. 드넓은 산을 내 집 앞마당인 양 살 수 없다면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갖고자 하는 소망을 품었다. 하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땅값을 생각하고 매일매일의 먹고살기를 생각하자면 그것조차 나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는 수선화처럼 몇천 원짜리 플라스틱 포트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작은 화분이나 꽃 한 송이에서도 자연의 위로와 아름다움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기억을 좀 더 뒤로 돌려보면, 나는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에서 파는 꽃엽서를 모은 적이 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촌스럽고 조악한 꽃 사진이었지만, 그 시절 내 눈에는 천국을 훔쳐본 듯 황홀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꽃의 아름다움은 어린 나의 눈에도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땟국물이 줄줄 흐를 것 같은 궁색하고 초라한 나의 일상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하던 아이였다. 나는 빠듯한 용돈을 아껴 엄마에게 꽃을 선물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때 꽃을 받아 들던 엄마의 얼굴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황스러운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의 살림 형편은 꽃을 보고 좋아하기보다 당황하는 쪽이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을 꿈꾸며 사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옹색한 나의 인생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웬만한 것으로는 덮을 수도 가릴 수도 없는...
나는 강렬한 것이 필요했다.
도착
대학시절, 정원사 시간에 영국의 정원에 관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밭과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그곳에 가득했다. 영상을 보는 내내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 어린 날 서랍 속에서 꺼내 보곤 하던 꽃엽서 속의 세상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몇백 년의 세월을 돌과 함께 쌓아 올린 고성이 그 푸른 정원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웠지만 허상한 시간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풍경이기도 했다. 목책을 두른 풀밭에서는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으면 그 뒤로 부드러운 능선의 평원은 끝도없이 아득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름모를 풀과 갖가지 야생화가 노랗게 또는 분홍으로 초록과 함께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흔드는 바람이... 함께 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었지만 영상을 보는 내내 마음이 울컥해지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 수선화는 그 풍경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출처 upUnsplash
히드로 공항에 내려서 깐깐해 보이는 인도 남자에게 어설픈 영어로 입국 심사를 받고, 묵직한 가방을 찾을 때 까지도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난생처음 온 해외여행이었다. 어찌나 긴장되고 가슴이 뛰는지, 시내로 들어가는 지하철을 탈 때까지 내내 손가락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행여 누가 잡아가기라도 할까 봐 몸의 근육들이 잔뜩 굳어 있을 지경이었다. 런던 시내로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나는 지하철을 선택했다. 저렴했으니까. 가끔은 명확한 나의 처지가 여러 가지 고민을 덜어주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좁은 지하철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야말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지하철 안을 꽉 메우고 있었다. 살면서 외국인을 만난 기회가 거의 없었던 나는 절로 눈이 휘둥그레 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짜 휘둥그레 해 질 일은 곧 일어났다. 깜깜한 지하를 달리던 튜브가 공항에서 멀어지자 차즘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언더그라운드가 오버그라운드로 변신하는 순간 나는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리고 눈이 빛에 조금씩 적응되자 보고 말았다. 내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풍경들, 목가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아름다운 평원이 펼쳐진 모습을... 그곳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쏟아지던 햇살 아래서, 그때 나는 난생처음 세상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름답다는 말,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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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나는 영국이나 런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정원을 보고 꽃구경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두꺼운 여행책자나 거창한 계획도 없이 그저 ‘꽃’을 따라가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런던을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6년 동안 해마다 런던에 가서 꽃이 안내하는 그 길을 걸었다. 아직도 런던의 돌바닥에 부딪히던 내 구두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방황이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플로리스트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정원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사실 그냥 어슬렁 거리고 싶기도 했다. 여전히 나는 일상의 나날을 살아낼 자신의 없었던 것 일까. 엉뚱하게도 일찍 산에 들어가지 못했던 분풀이 이기도 했다. 꽃을 보고 있었지만 사실 나를 보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지 깨닫기도 했다. 전 세계의 인종들이 모여 와 들끓는 런던의 골목길에서 나는 마치 산에 들어온 듯, 혼자 일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하고도 두려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