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란 행운
직장동료는 때론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어떤 때는 가족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더 많은 일을 함께한다. 나는 구직을 하는 후배들에게 직장을 만나는 일은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과 비슷하다고 얘기한다. 꼭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아니라 인연이 닿는 사람과 사귀게 되는 것처럼 직장도 양쪽의 인연이 타이밍을 만나 성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연을 통해 만난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나의 인연+동료의 인연이 만나야 가능하기에 더욱 따따블의 깊은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현재 직장에서 12년을 일했는데, 동료들의 상당수가 10여 년을 일했으니 한 명 한 명 인연이 특별하다. 그중에서도 몇 명은 그들의 첫 직장부터 지금까지 그들 기준 평생직장에 내가 동료로(게다가 상사로) 존재했다. 그중 두 명은 내가 사무국장일 때 우리 단체에 인턴으로 입사해(졸업 후 첫 직장) 쭉- 여기서 일한 동료들이다. 인턴이 아무리 일을 잘하고 마음에 들어도 정규직 TO가 생겨야 가능한데, 이 둘은 그 인연이 딱 맞아 함께 오래 일하게 됐다.
그 외 한 명은 내가 이전 직장에 있을 때 다른 파트에서 인턴을 마친 그를 우리 파트로 데려오며 정규직으로 전환해서 함께 일했다. 내가 지금 단체로 옮기고 나서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는 그에게 제안을 해서 우리 단체로 옮기게 되었다. 우리 단체에서 운영회계를 맡아 매니저에서 팀장으로 승진하며 나와 직접적인 업무 파트너로 오래 일했다. 나의 개떡 같은 요청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번개처럼 해내는 그는, 말수가 적고 느린데 손이 매우 빠르며, 일이 매우 빠른데 실수가 거의 없는 국보급 파트너라 할 수 있다. 내가 대충 말해도 너무 잘 알아듣는 그는 업무 메신저에 '네~'라는 짧은 답을 남기고 잠시 후에 결과물을 바로 송부해 준다. 그가 뭔가 이해가 안 가 추가 질문을 했다는 것은 내가 뭘 매우 잘못한 경우다.(개떡이 아니라 떡 이전 형태로 준 경우) 뭔가 결정이 어려워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부드럽고 유한 성격에 반해 단호한 대답이 돌아올 때가 많다. 안 물어봤으면 어쩔 뻔. 그런 그와 일하는 건 나의 행운이다.
이들과의 인연도 보통은 아닌데, 진짜로 부부보다 깊은 인연의 동료가 있다.
우리의 첫 만남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 면접을 볼 때 나는 그녀의 면접관이었다. 당시 나는 자활지원센터의 실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녀는 다른 파트였던 복지관에 면접을 보러 왔다. 우리 파트는 마땅한 사람이 없어 사람을 못 뽑은 상태였고, 그녀가 면접을 본 파트는 경력자가 있어 그녀는 떨어질 상황이었다. 경력은 없지만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관장님이 나에게 "저 친구를 그쪽 파트에서 뽑으면 어떠냐, 본인 의사를 물어보자"라고 제안하셔서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취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오래 준비해 온 사람처럼 "집수리 사업단"이라는 사회초년생이 맡기에 쉽지 않은 업무를 씩씩하게 해냈다. 당시 우리 업무는 기초생활수급자 분들 중 근로능력이 있는 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급여를 주는 일이었다. 주민센터에서 배치된 주민분들은 이 일을 꼭 해야 수급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근로의욕은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분들이었다. 특히 그녀가 맡은 집수리 사업단은 주로 50, 60대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 아저씨들과 국민체조 음악을 틀고 체조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금세 직접 도배를 배워서는 견적을 내고 1인 이상의 작업을 뚝딱해 냈다. 그때 나는 그곳에서 큰 애 독박 육아에 지쳐 퇴사를 하고 지방에서 일하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게 된다. 함께 일한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너무 강한 인상을 남긴 그녀와의 첫 직장 인연이었다.
두 번째 인연은 나의 그다음 직장으로 이어졌다.
나는 1년여의 전업주부 생활을 접고 재취업에 성공한다. 빈곤아동현장을 지원하던 단체였는데, 기업 사회공헌 사업팀으로 입사하게 된다. 그 당시 기업의 지원규모가 꽤 컸기 때문에 팀을 확장하며 계속 사람을 뽑고 있었다. 나는 입사하여 자리를 잡은 후에 아직도 자활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에게 이직을 권유하여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진짜 제대로 같이 손발을 맞추게 되는데, 그때 나는 휴직기간으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찰랑찰랑 그릇에 차고 넘칠 때였고,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엄마네에 얹혀살며 육아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된 상태였다. 그녀는 첫 번째 직장 때처럼 새로운 일도 오래 한 일처럼 금방 숙지하고 적응했다. 그 당시 나는 팀장이고 그녀를 포함한 팀원이 세 명 있었는데 우리 네 명은 똘똘 뭉쳐 큰 행사부터 해외연수까지 3년이란 사업기간 동안 맡겨진 일의 최대치를 해냈다. 기업 지원기간이 종료되고 우리 네 명은 법인(본부) 사무국으로 흡수되며 각기 다른 팀으로 흩어졌다. 너무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부장님들이 일 잘하던 팀원들을 쏙쏙 뽑아간 것 같다. 팀원을 잃고 업무의 재미가 떨어진 차에 우리 단체 대표님이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을 하게 됐다. 단체에서 누가 따라갈꺼냐가 논의되던 차에 정책연구원 경력이 있던 내가 1번으로 뽑히게 된다. 갈지 말지를 망설이는 내게 총장님이 "누구 한 명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을 데리고 가라"며 채용 카드 한 장을 주셨다. 함께 일했던 세 명 모두 너무 훌륭했지만 나는 결국 그녀를 뽑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그다음 직장이었던 국회 의원실이 그녀의 세 번째 직장이 된 셈이다.
국회에서 나는 사실 적응을 못하고 한 달 만에 퇴사를 하게 된다. 그녀를 데리고 와 놓고 이게 웬 책임 없는 행태인가! 하지만 적응 못한 나에 비해 그녀는 4년의 국회 임기를 모두 훌륭히 채우고 임기종료와 함께 퇴사를 한다. 그 사이 나는 이런저런 직장을 옮겨 다니다 지금 일하는 단체에 안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나는 처음 1년 반의 팀장을 거쳐 국장으로 승진하였고, 우리 조직은 계속해서 채용을 하게 된다. 그때 그녀는 국회를 마치고 둘째를 출산하여 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예상대로다.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그녀는 아직 어리던 아이들을 떼어놓고(?) 입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호흡은 말해 뭐하랴. 이전 글에 나오듯 속도감 있는 우리 버스에서 앞자리에 같이 앉은 그녀도 얼마 전 10년을 꽉 채웠다.
아무리 같이 일하고 싶어도 인연이 닿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우리에게는 한 번이 아니라 네 번이나 일어났다. 전생이 있다면, 우린 전생에 어떤 사이였을까? 그녀가 자주 자기가 뭘 말하려고 하면(아직 말하기 전에) 내가 답을 한다고 말한다. '그때..'라고 말을 시작하면 내가 그때가 언젠지 아는 것이다. 왜냐면 나도 지금 바로 '그때..'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20년이 넘는 직장생활 중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었던 좋은 장면에 항상 그녀가 있다. 아니, 그녀가 있어서 그런 장면이 가능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직장이란, 이직이란 때론 이렇게 행운을 이어가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