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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진 May 09. 2024

기자 없는 기자회견

함께 걸어가는 길

사회복지사인 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 그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나의 노력으로 인해 한 사람의 삶이 변화되길 바라는 마음이 늘 간절하지만 사람의 삶이 바뀐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의 급한 불을 끄고 나면 유사한 또 다른 사람, 내가 만나지 못한 더 많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게된다. 나의 이 작은 노력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려움에 처한 한 사람을 돕는다고 무엇이 바뀔까 하는 무력감을 종종 느끼게 된다.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 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나의 사회복지 활동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일이다. 병원비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과 가정을 하나 하나 돕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린이 병원비를 국가가 보장하도록 건강보험 시스템이 변화된다면, 질병을 없앨 수는 없어도 병원비로 고통받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의 사회복지 활동은 대부분 특정 민간단체에 속하여 아동이나 청소년, 가족을 돕는 활동이었는데 처음으로 "연대"라는 형태로 여러 조직, 전문가들과 함께 정책 변화를 요청하는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첫 시작은 아무도 오라하지 않고 누구도 부르지 않은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연대"에 스스로 참여하겠다고 신청하면서 시작되었다. 6-7개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모여앉아 운영회의를 하는 자리였다. 내용도 잘 모른채 그저 분위기만 살피며 어색하게 앉아있었던 첫 회의. 회의를 마치고 이번주에 건강보험 재정편성과 관련된 "기자회견"이 있으니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참여하라고 했다.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연대활동을 하겠다고 했으니 참여해야지. 생각하며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덥석 나에게 그럼 "발언"을 한 꼭지 맡으라고 한다. "발언"이라니. 그때까지 발제나 발표, 토론은 해봤어도 "발언"은 처음이었으니, 개념 자체가 잡히지 않았다. 그날의 기자회견 장소는 국회였는데, 국회 기자회견실인 줄 알았던 장소는 국회 정문 앞이었고, 기자회견이란 것에 기자는 없고 우리끼리 그저 허공에(아니, 카메라에) 대고 보도자료를 읽고 발언을 하는 일이었다. 모인 사람이라고는 연대의 6-7명과 그걸 영상에 담는 사람, 지나가다 흘끗 흘끗 우리를 쳐다보는 시민이 전부였다. 그날은 어리둥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알수 없었는데 연대활동이라는 것이 기자들을 모을 만큼 영향력이 있지도 않고 그저 영상으로 담아서 SNS에서 알리고 홈페이지에 기자회견문을 올리고 이런 주장과 활동이 있음을 꾸준히 알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때론 기자들을 부르고 크게 행사를 하기도 하지만 매번 그렇게 할 여력이 없으니 대부분의 "기자회견"은 그렇게 기자 없이 진행되었다.

준비된 기자회견문을 읽고, 참여자들이 한마디씩 발언을 하고 나면 진행자가 "어린이병원비 국가가 보장하라"고 선창한다. 참여자들은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제창을 한다. 오른손을 ㄱ자로(ㄴ자인가?) 위로 올리면서. 학교다닐 때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는 학생회 선배들의 집회에서나 봄직한 구호 제창과 길거리에서의 행사진행은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에겐 낯설다 못해 도망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함께하는 연대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연구자도 있었고 복지관 관장님, 아동재단 과장님, 의사 선생님, 사회복지사협회 과장님 등등이 그 연대를 이끌던 활동가들이었다. 그래, 뭐. 길거리면 어떻고 어색한 구호제창이면 어떠냐. 그 방법이 무엇이든 필요하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마음으로 첫번째 어색한 회의와 충격의 기자회견 발언을 마쳤다.


사회복지를 공부할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사회복지사가 해야 하는 역할 중 "옹호"라는 것이 있다. 옹호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을 편들어 지키다.' 영어로 Advocacy.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사회 현상을 바로잡고 다양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옹호활동을 하는 사회복지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이러한 영역은 시민사회 단체쪽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사회복지사들은 옹호활동에 매우 소극적이다.

옹호활동은 보통 사회변화를 위해 영향력을 미쳐야 하기 때문에 개별 조직 차원에서 하기 힘들고 여러 단체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모여서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단체, 환경단체들이 개별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걸고 모여서 캠페인이나 정책적 주장을 하는 것이 예라 할 수 있겠다. 사회복지단체들은 이러한 "연대"활동을 잘 하지 않는다. 그저 개별 조직 중심으로 특정 복지 사업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사회복지사야말로 옹호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첫번째의 기자회견, 첫번째인 연대활동 이후에 나는 여러 연대활동과 다양한 구호 외침을 하게 되었다.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 활동이 앞에 글에서 쓴 것처럼 실제로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개별조직의 활동만큼이나 연대활동이 중요하고 의미있음을 깨닫게 된 까닭이다. 가끔 연대에 가면 사람들이 서로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근데, 이 연대활동을 도대체 왜 하냐고. 왜냐면 연대를 한다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연대들은 모두 돈이 없다. 대부분 돈을 내면서 활동한다.) 알아주는 것도 아니며, 일만 많아지기 때문이다.

어린이병원비연대에 들어간 2016년 이후, 나는 사회적 활동을 하는 음악가들의 네트워크*, 비영리단체의 책무성, 투명성을 위한 모임*, 청소년 주거권 연대* 등의 연대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쏟았다. 나는 왜 그렇게 연대, 옹호활동을 열심히 했을까?


개별조직에서 열심히 활동하면서도 뭐가 바뀌는지 몰라 지치고 소진될 때, 이러한 연대활동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해준다. 우리가 한개의 오케스트라, 10개의 오케스트라를 통해 취약계층 아이들에게 음악을 알려준다해도 아이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을 때 사회적 활동을 하는 음악가들의 풀을 확장시키는 활동을 하면서 좀 더 큰 변화를 꿈꾼다. 탈가정하여 거리에서 위험에 처한 청소년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면서도 이런 거리 청소년들의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절망 속에 빠질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도 다양한 주거의 선택지를 만들자는 활동을 함께하면서 우리의 활동이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찾는다. 그렇게 나는 일개 사회복지사로서 사회의 변화를 꿈꾼다.

연대활동의 취지는 굉장히 거창하게 들리지만, 연대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 실질적인 동력은 함께 한 사람들 덕분이다.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일만 많은 연대활동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말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도 아니고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전공을 가졌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손발을 맞추면서 당연하게도 이들과 친해졌고 서로 의지했고 좋아하게 되었다. 각 연대마다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동료를 넘어 개인적 친구가 되었다. 거창한 미션이 있었지만 결국 그곳에 가게 하는 것은 거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당연히 모두 사회복지사는 아니다. 병원비연대에서는 의사샘도 있었고, 음악가연대에는 음악가가 대부분이었으며, 청소년주거권 활동에서는 변호사, 인권단체 활동가, 청소년단체 실무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본 사회는 나의 시야를 넓혀 주었고, 그들의 다양한 전문지식은 나를 성장하게 했다. 이렇게 훌륭한 연대활동을 어떻게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활동이 지지부진 성과가 없어 보일 때도 많고, 사회는 변화되는가 했다가도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가면서 우리를 절망시키기도 하지만 이것은 나 하나의 바램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노력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나를 일으켜세우고 계속 걸어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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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참여적음악가 네트워크(Socially Engaged Musicians' Network_SEM 네트워크) 홈페이지 > 클릭

*공익네트워크 우리는 홈페이지 > 클릭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 홈페이지 > 클릭

* 사진출처 :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연대 / 사진설명 :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 기자회견 사진. 나의 첫번째 기자회견 사진은 아니지만 이렇게 어떤 장소 앞 거리(이때는 어린이병원 앞), 누군가 발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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