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필, 행운을 빌어 줘
‘몇 번의 절망이라도 이겨낼 수 있어, 혼자가 아니니까.’
내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우울감을 벗어나기 시작할 때 들었던 생각이다. 학생시절부터 갖고 있던 우울감이 심해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스물 중반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모님의 사이가 더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지고, 글을 쓰고 커피를 하겠다고 도서관을 나와 제대로 된 직장도 다니지 않으면서 나는 나의 선택에 계속 의문이 들었다. 그 후 카페를 옮기며 아르바이트에서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내게 항상 머무르고 있던 우울감은 처음 커피를 시작할 때 가졌던 호기로움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내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더는 나갈 수 없게 발목을 잡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일하고 있는 프랜차이즈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던 나는 같은 프랜차이즈로 이직을 생각했고, 친했던 친구는 다른 프랜차이즈라도 연봉이 높으면 무조건 가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도 걱정했던 것은 어딜 가든 내가 지금 갖고 있는 능력을 내보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것에 몇 번이고 크게 데어본 나는 다시 적응하는 그 시간을 내가 잘 보낼 수 있느냐가 큰 걱정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 ‘있는데서나 잘하자’라며 스스로를 몇 달이고 머무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몇 달이고 머무르다가 결국에는 우울감이 극도로 심해졌고, 나는 결국 스스로 병원을 찾았다.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날들이 병원을 왕래하고, 약을 먹으면서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생각은 많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 뒤죽박죽이었던 머릿속이 어느 날부터인가 정리가 되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었던 것을 찾기 시작했고, 내가 해야 하는 것들, 할 수 있는 것들, 할 수 없는 것들을 점점 명확하게 구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달라진 것은 내가 누군가의 눈치를 덜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상대의 눈치를 보면서 내가 하기 힘든 것을 하려고 애를 썼다면 눈치를 보고 알기는 하지만 ‘할 수 있는데 까지만’이라는 생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주는 부담감이 줄어들었고, 실수가 줄어드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늘기 시작했다.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나의 모든 날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직면했을 때 나의 태도가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명확히 하려고 했고, 거기까지는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에도 나는 스스로를 몇 번이고 다독거렸다. ‘할 수 있다, 잘하고 있다. 무리하지 말자.’라고.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고 나니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남아 있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 더는 나빠질 수 없을 것 같았고 한 편으로는 몇 번이고 이런 문제들이, 또는 더 심한 문제들이 내게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무너질 수는 없으니까 버터 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과 다르게 무엇이든 해보자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는 학생시절부터 갖고 있던 질문이었다. 우울감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힘든데 왜 살아.’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나의 존재에 대해 고민했다. 누군가 내가 평생 겪어야 하는 고통과 절망을 한 번에 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이쯤이면 작은 희망 하나는 줘도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쉽게 어디로든 나아가지 못했다. 내가 발을 딛는 그곳에 어떤 절망이 있을지 몰라서 겁을 먹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겁도 나고 걱정도 되지만 나아가려고 한다. 나아가지 않으면 내가 가는 그 길에 있는 작은 희망도 만날 수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 총 몇 번의 몇 번의 희망과
그리고 또 몇 번의 몇 번의 절망과
차가운 웃음 혹은 기쁨의 눈물을
맛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행운을 빌어 줘
내 앞길에 행복을 빌어 줘
계절이 흘러 되돌아오면
더 나은 내가 되어 있을 테니
기대해 줘
-원필, 행운을 빌어 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