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을 했다가 집으로 들어왔더니 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오늘 유나와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줬다. 딸은 유나를 데리고 지인을 만나러 구리에 다녀왔다고 했다. 구리까지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아서 30분 정도 걸렸는데 구리에서 집까지 오는 길은 퇴근길과 겹치면서 심하게 막혀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고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이 막히면서 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직면했다고 한다. 카시트에 자고 있던 유나가 푸지게 응가를 하고 나서 배가 고파 분유를 달라고 자지러지게 울어대고 운전하고 있던 딸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고 한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유나 응가도 치워주고 분유를 먹이려고 해도 길이 막혀서 갓길이 나오지 않자 딸은 마음이 불안해지고 눈물만 주르르 흘러내렸다고 했다.
유나의 응가 뒤처리와 자지러지게 우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던 딸이 무력감을 느끼면서 걱정과 불안감이 몰려온 것 같다. 부모들은 자녀를 키우면서 이렇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 걱정과 불안이 몰려온다. 우리 부부에게도 딸을 키우면서 아직도 선명한 그런 기억들이 있다.
하나의 장면은 딸이 생후 6개월쯤의 기억이다. T.V에서 소아과 의사가 나와서 유아기 고관절 증상으로 다리 길이가 달라지는 사례를 전해주었다. 소아과 의사 이야기를 듣고 딸의 양다리를 재 봤더니 다리 길이가 차이가 났다. 그때부터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걱정과 불안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걱정으로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뜬 눈으로 지새우고 나서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소아과 병원에 찾아갔다. 다행히 이상은 없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불안과 걱정이 기억에 선명하다.
또 다른 기억은 딸이 3살 때쯤이다. 맞벌이를 했던 우리 부부는 집과 회사 중간쯤에 있는 어린이집에 딸을 맡겼었다. 하루는 회사에 있는데 와이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사로 전화를 잘하지 않았던 와이프의 전화에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와이프는 겁에 질려서 떨리는 목소리로 어린이집에서 사고가 나서 딸의 새끼손가락 끝이 잘려나갔고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으니 당장 병원으로 와 달라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병원까지 가는 길은 길고도 멀었다. 손가락이 잘려나갈 정도로 사고가 났으니 딸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새끼손가락은 잘렸으면 딸은 불구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두려움이 몰려왔다. 극도로 긴장된 상태여서 그런지 심연 어디엔가 웅크리고 있었던 슬픔이 마음으로 올라오면서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수술을 하면 문제가 없겠지 하면서 나를 위로해 봤지만 불안감은 그런 위로를 뛰어넘었다.
병원에 가보니 이미 봉합수술이 끝난 뒤였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와이프는 사건의 자초지종과 수술한 의사의 소견을 전해줬다. 의사는 딸의 손가락은 성장판에 손상을 입었고 성장판이 잘 봉합될 활률은 20%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더 불안해졌다. 새끼 손가락이 짧은 채로 평생을 살아가야 할 확률이 80%라는 말이었다. 딸이 평생 남들 앞에 예쁜 손을 내밀 지도 못하고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딸에게 "아빠가 미국에 가서라도 새끼손가락 반드시 고쳐줄게"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에는 미국에 가면 못 고칠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의사 소견에 불안해하고 있을 와이프와 나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이다. 다행히 20%의 확률이라던 딸의 성장판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지금도 딸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짧다.
이랬던 딸이 어느덧 결혼을 해서 자신을 닮은 딸을 낳아 부모의 입장이 되었다. 딸이 유나 때문에 눈물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니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이 들어왔다. 앞으로 딸은 지금과 다른 차원의 유나 문제로 힘들어하고 눈물 흘릴 일이 많을 것이다.
유나가 학교에 입학해서 딸의 기대와 다른 성적표를 가져온다면 마음이 조급해질 것이고 유나가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면 걱정과 염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유나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딸은 유나와의 갈등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불면의 밤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딸은 유나와 피할 수 없는 사춘기 전쟁을 치르면서 부모를 진정 이해하게 되고 세상의 이치를 좀 더 깨우치면서 성숙해 나갈 것이다.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오늘 같은 일들이 앞으로 어쩌면 더 많아 놀라고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겪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진정한 인간으로 성숙해 나가는 과정이다. 자녀가 아니고는 인간이 과연 성숙해질 수 있을까? 딸이 유나를 키우면서 겪어나갈 힘든 인간 성숙의 과정을 마음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