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편지 쓰기

2025학년도 대수능

by 노이령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만큼 표현의 욕구로 흘러넘치는 것도 없다.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 편지를 쓰게 한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어렵고 진정하며 운명적인가를 설명하고 싶었다. 편지는 사람을 설득하거나 매혹시키는 방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랑의 편지는 마지막 순간, 도구적이지 못하다. 세상의 모든 글쓰기가 최후의 순간에는 처음에 품었던 소소한 의도를 배반하는 것처럼. 그 통제할 수 없는 익명의 욕구가 그 편지의 현실적인 목표를 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모든 사랑의 편지에는 아무 전언도 들어있지 않다. 거기에는 결정적인 정보나 주장이 들어있지 않다. 다만 내 고백을 누군가가 들어준다는 충만한 느낌. 희미한 불빛 아래서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할 때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부끄러움 따위. 고백이란 결국 2인칭을 경유하여 1인칭으로 돌아온다. 그의 들끓는 고백의 언어들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다. 한동안 그는, 사랑하는 ○○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자주 썼다. 그녀는 그의 편지를 사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편지 속의 그’를 그녀는 사랑했다. 편지 속에는 그가 찾아낸 자신의 또 다른 영혼이 있었다. 또 다른 영혼의 ‘그’는 순수한 열정과 끝 모를 동경과 깊은 이해심을 가진 존재였다. 그도 역시 그녀처럼 자신의 편지 속 1인칭 화자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하지만 너무 뻔해서 가혹했던 지리멸렬한 시간들 속에서 그는 편지 속의 1인칭 주체를 잊어버렸다. 편지조차 쓸 수 없는 시간들이 무심하게 지나가고, 다시 편지를 쓰고 싶었을 때, 그는 이미 ‘편지 속의 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편지 속의 그’를 연기하는 것이 부끄러웠고, 자신의 비루함을 뼛속 깊이 실감했다. 그는 ‘사랑하는 ○○에게’라는 편지를 쓰고 싶어 하는 자신 속의 어떤 늙지 않는 영혼을, 그 순수한 인격을 외면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듣기를 바라는 모든 고백이란, 위선이 아니면 위악이다.


- 이광호,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할 때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편지를 써야 했다. 편지 외엔 마땅한 수단이 없기도 했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오직 편지이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어렵고 진정하며 운명적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말하지 않음으로 그 사람에게 향했던 모든 마음이 잊히는 게 두려웠을 뿐이다. 망설임과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편지를 부쳤을 때, 나는 기어이 편지를 보내고 만 것이다, 라는 성취나 편지를 보낸 날로부터 마루 위에 앉아 편지를 기다리던 내 모습을 연민하게 되는 나르시시스트적 도취를 갖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사랑의 편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도구적이었다. 나는 편지를 통해 그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의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고 내가 아는 신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를 주장했다. 내가 편지에 담은 전언은 나의 마음을 배반하지 않는, 나의 마음이 오래 거느려왔고, 오직 그 사람의 영향으로 발견된 어휘와 표현들뿐이었다. 그래서 나의 고백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말들은 어설펐고 규격봉투에 담긴 나의 전언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말하고 싶었음에도 혹시나 어떤 사고에 의해 그 사람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괴상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반송된 편지를 다시 읽으며, 전혀 근사해 보이지 않는 ‘편지 속의 그’를 저주하고 싶었다. 발신인의 집주소를 바꿔 쓸 수 없는 것만큼이나 ‘편지 속의 그’를 만들어내는 것은 더 아득한 일이었다. 허공은 경멸에 차 있었고 나는 다른 과정에 의해 나의 비루함을 뼛속 깊이 실감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쓰고 싶었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나에게, 라고 써놓고 나를 학대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 시간도 위선이고 위악이라면 나는 나를 더 숨긴 채, 과장하고 말 것도 없는 나의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써볼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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