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플은 배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깨우칠 점을 찾고 스스로 거듭나는 것만큼 악플러에게 화끈한 화답하는 일이 없겠지만 실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종이에 스쳐도 피가 나고 아픈데 소리도 없는 저 글자는 어찌나 날카로운지 금세 베이고 터지고 또 짓밟힌다.
이유 없는 배설에 이유를 찾다 보니, 결국 찾지 못해 자신의 취약점 앞에 서고 만다. 어떤 상황도 배우고 닦고 깨우치면 이득이란 생각이지만, 아무리 교훈점을 찾아보려 해도 악플에는 이유가 없다.
악플은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종속시키고 잠식시키는 것뿐이다. 어떤 행동이나 글, 생각 따위는 곧 한 사람을 이룬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편적인 한 부분이 곧 그 사람을 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악플은 단편적인 그 모습을 깊숙이 파고들어 살점을 뜯어내고 거기다가 끝내 배설한다. 마치 영역표시처럼.
부처님은 자신에게 욕을 하는 자가 있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욕은 여전히 상대방의 것이라고 하셨다. 가르침과 교훈은 명확하지만 알고 있다 하여 항상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화에 잠식되고 나면 인체기관이 화마에 둘러싸인 것처럼 이성마저도 모두 전원이 꺼져버리니 말이다.
배설은 받지 않는 게 최선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가 아니라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도망친다고 욕하여도 개의치 말자. 삼십육계 줄행랑은 손자병법에도 나오지 않던가?
그럼에도 배설이 묻었다면 바로 안 보이게 지워버려 깨끗이 닦아내자. 없던 일로 만들 순 없겠지만 닦아내고 나면 금세 지고 말 것이다. 물론 여기서 지는 건 지는 게 아니니 염려말자.
악플은 사고와도 같아서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좀 놀라겠지만 얼른 정신을 딴 데로 돌리는 게 중요하다. 어렵겠지만 주문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 내게 소중한 무언가에 떠올려 보자. 신이 우리에게 내린 두 가지 선물이 있다면, 한 가지는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떠올리지 않으면 곧 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망각이란 선물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악플에 지지 말자. 닦아내고 닦아내면 결국 지는 건 악플일 뿐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대로 사는 것만큼 당연한 일은 없다. 그리고 나는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버팀목이자 지지대란 걸 잊지말자.
그럼에도 나를 향해 쏘아대는 그것들에 대해서는 김훈 작가의 글귀 하나를 담아본다.
사람들이 작당해서 나를 욕할 때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네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게 아니고, 니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까 니들 마음대로 해봐라. 니들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거룩해지는 일 없이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
_ 소설가 김훈
나: ‘네 생각이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면 그또한 네 자유니 개의치 않으리라. 나는 완전하지 않을지언정 충분히 온전하다는 건 세상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부디 너는 걱정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