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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벌레 잠잠이 Sep 26. 2021

마녀에게 홀리다

<마녀의 독서처방>을 읽고

  그녀는 마녀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적재적소에 세계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고전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방대한 사람들을 불러낼 수 있을까.


 헌책방에서 위안을 받았던 헬렌 한프에서 저, 원주민 데르수 우잘라뿐 아니라 불행했던 실비아 플라스, 소현세자에 이르기까지.

설레던 순간과 사랑을 잃었던 순간 또한 절망의 나락에서부터 희망의 하늘까지 어찌 이리 자유자재로 날아든단 말인가.


 마치 마법의 빗자루를 탄 것처럼 나도 어질어질하다.


 아아, 빠져들면 안 돼,를 외쳐보지만 속절없이 빠져들고 만다. 특히 그녀의 처방은 특효약이다. 그녀는 틀림없는 마녀다. 그것도 그 어떤 마녀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책 읽는 마녀’인 것이다.


  나 역시도 책 읽기에 있어서라면 누구 못지않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적어도 마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책벌레였던 나.

그로 인해 어린 시절이 풍요로웠고 그로 인해 질풍노도기의 방황을 견뎌냈던 나.

하지만 그로 인한 대가도 톡톡히 지불했다.


인생을 먼저 살아버렸다는 것.

몸으로 살기 전에 머리로 알아버렸다는 것.

해서, 늘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현재를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했던 나였다.


행복한 순간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이 시간이 곧 흘러가 언젠가는 추억의 사진처럼 남을 것임을 예감했다. 해서, 그런 순간조차 조금은 쓸쓸했던 것 같다.


대신 그 반대의 경우에도 결코 상황을 과장하거나 확대해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말한다.


 “내가 책을 택한 이유는 책이
유일한 스승이어서가 아니라
책이 언제나 내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몰라 힘들고 막막할 때
내 손을 잡아준 것이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책에서 구한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위로였는지도 모릅니다.”


  왜 마녀의 독서처방을 받기도 전에 나는 이 서문에서부터 울컥했을까. 어쩌면 나 역시도 책에서 배움도 얻었으나 그보다 더한 위안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욕에 무릎이 꺾이던 날에도
그리고 모든 것이 의심스럽던 그 순간에도,
나는 시립도서관 한구석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 그때 읽었던 책의 글귀들은
다 잊었지만,
묵묵히 내 눈물을 받아주던
책의 따스한 과묵함은
잊히지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도 난 한참을 서성거렸다.


 몇 해 전 일이 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일을 하기로 하고 나갔던 회사에 가보니 상황은 내가 들은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하자니 모든 상황이 벽처럼 느껴졌다.


 사람들마저 병풍처럼 내 앞을 막고 길을 내주지 않는 듯했다. 힘든 일도 항상 내 편에 서주고 응원해주었던 동료, 선후배들 덕분에 고단한 시간을 이겨냈던 터였다.


 이때처럼 서늘한 분위기를 느끼며 일을 했던 적은 없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갈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서점으로 달려갔다. 닥치는 대로 이 책 저 책을 읽어댔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스산해지는 나에게 마녀가 조용히 처방전을 내민다.

‘사표 쓰고 싶을 때’ 그러나 그만둘 수도 없고 무조건 버틸 수도 없을 때 나카지마 아츠키의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을 먼저 만나보라고. 이 책을 읽고 그녀도 “무언가를 하려니 자존심을 잃을까 겁이 나고, 독야청청하자니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에 성이 나고…… 딱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지요.”라고 고백한다.


  나 역시 가슴이 뜨끔하다.

돌이켜보니 그때 어떤 상황보다는 내 자존심이 더 큰 벽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이런 내게 덧붙인다.


 “큰 포부가 있는 인생은 행복합니다.
하지만 때론 초라한 현실과
암암한 미래를 견뎌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불행은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견딜 수 없다는 절망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때 그 시간을 버티고 견뎌냈던 것이 지금 나를 좀 더 단단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불행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것.

그보다 무서운 것은 절망인 것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세상에 딴지 걸고 싶은 날’ 마녀는 또 하나의 처방을 제시한다.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 시집에 실린 시편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일> 전문)


 그저 조용히 내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라는 것을 일깨워준 낙엽 하나.

거기서 위안을 받는 시인과 마녀 그리고 나.

지금 내 곁을 가만히, 조용히 지켜주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같던 마음이 봄비를 머금은 새싹처럼 촉촉해진다.


  고맙다.

 늘 가까이 곁에 있어서 당연하게 느끼지만 큰 힘이 되는 나의 가족들.

여기서 위로를 받으니 용기가 생기고 옆을 둘러볼 여유도 생긴다.


 그러자 너무 가까이 그들을 들여다보며 간섭하고 참견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고 마녀는 덧붙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을 위해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일 겁니다.”라면서.


  모든 사랑은 자기애의 표현이라는 마녀가 가장 눈을 치뜨는 것은 아이들을 향한 자기식의 사랑이다.


“ 조바심이 나고 훈수가 두고 싶어도
걱정이 되고 닦달을 하고 싶어도
묵묵히 참고 기다리는 사랑이야 말로
우리 아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일 겁니다.”


  그리고 마녀는 ‘떠날 때를 아는 사랑’으로 김성호의 <큰 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처방약을 만든다. 오색딱따구리 엄마와 아빠가 새끼를 키울 집을 10여 일에 걸쳐 짓고 또 10여 일은 알을 품고, 또 태어난 한 달은 태어난 새끼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일상을 꼼꼼하게 적은 관찰기란다.


 산란한 지 33일째가 되면 아빠 오색딱따구리는 새끼에게 홀로서기를 가르친다.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먹이를 나르며 새끼를 돌봐온 아빠가 밤이 깊도록 둥지를 찾지 않는 것이다.


  그다음부터 엄마와 아빠 오색딱따구리는 먹이를 물고 와도 먹여주는 대신 눈앞에 들고 와 약을 올린다고 한다. 새끼들이 배가 고파 울어도 꿈쩍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연습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별의 날.
 

 “아빠 새는 일곱 번째 미루나무 전체를 돌아다니며 둘째를 찾고 있습니다.

벌써 네 시간째입니다. 아빠 새가 첫째와 둘째를 키운 정성을 잘 아는 나는 아빠 새가 더 이상 오지 않을 때까지 미루나무 곁에 함께 있어주기로 합니다.……


부리에는 네 시간 전에 물고 왔던 먹이가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는 포기하는 모양입니다.
주위를 한번 찬찬히 둘러보더니 그렇게 홀연히 먼 북쪽 산을 향해 날아갑니다.”


  홀로서기를 연습시킨 것은 자신이었으나 정작 떠나간 새끼가 걱정이 되어 네 시간이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아빠 오색딱따구리에게서 내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홀연히 먼 북쪽 산을 향해 날아가는 뒷모습에서 언제나 내 등 뒤에서 나를 응원해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떠날 때를 아는 것도 사랑임을 큰 오색딱따구리에게서 배운다.’는 마녀에게서 나도 배운다.

나는 그러한 사랑을 하고 있는가, 반문해본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은
천 마디의 웅변을 무색게 하는
위로이고 격려입니다.
…… 밥을 먹으며 자식들은
잃었던 기운을 찾고
버렸던 희망을 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다시 살 만해집니다.”


  아이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숱하게 반복했던 말의 성찬 대신 오늘은 따뜻한 밥상을 준비해야겠다. 그 많은 말속에서 오히려 기운을 잃고 해쓱한 내 아이와 가족들에게 소박하지만 정성 어린 밥 한 그릇과 따끈한 책 한 권을 준비해야겠다.


 설령 그것이 책이라는 마녀에게 홀리는 일일지라도.


  마녀의 말대로 책의 가장 큰 쓸모는 침묵을 견디게 하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얻는 위안은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소박한 울림은 김이 모락 나는 따끈한 밥상 앞에 마주한 이들과 함께하는 이 삶이 참 고맙게 느끼게 해 줄 터이니 말이다.



*한 줄 평
기꺼이 빠져들고 싶은 책 읽는 마녀의 따뜻한 처방전!



책 제목: 마녀의 독서처방

작가: 김이경
출판사: 서해문집 | 2010년 0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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