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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Aug 23. 2024

내향인의 미국에서 살아남기

Don't need to be friend with everyone.

나는 고르자면 외향인보다는 내향인이다. 약속이 취소되면 신나는 정도의 내향인은 아니지만, 며칠 사람을 만나고 나면 하루 이틀은 집에서 쉬면서 티비도 봐야 하는 그런 사람이다. 아, 낯도 꽤 가린다.


그런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느낀 미국은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어디서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스몰톡을 진행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살아남기 좋다고 느꼈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고 눈에 띄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 눈에 띄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기회를 잡기 쉬운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어딜 가나 본인을 스스로 어필해야 하는 나라 같달까.


한국에서 꽤나 외향적이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낯선 문화와 낯선 언어와 소통방식에 성향이 조금 내향적으로 바뀌기도 한다. 하물며 원래 내향적인 나에게는 그런 외향성의 선호가 더 세게 와닿았다. 그리고 한국보다 외향적이라는 게 조금 더 눈에 띈달까? 한국에서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낯을 안 가리는 의미 같이 느껴졌다면, 미국은 좀 더 본인의 생각을 많이 말하고 어필하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대표적인 차이가, 한국에서는 생각을 다 정리하고 말해야 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반면에, 미국에서는 ‘말하면서 생각한다 (Think aloud)’라는 표현을 빈번하게 들을 정도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 서스름이 없다.


내가 한국에서 지낸 환경을 생각해 보면,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은 겸손이라는 것이 미덕인 사회였다. 나서는 사람들을 ‘나댄다며’ 곱게 보지 않는 눈초리가 있기도 했고, 자기 어필을 하는 걸 ‘잘난 척을 한다’고 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상대평가과 점수를 매기는 문화가 강하기에 ‘틀린 답변‘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었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니까 말을 하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 것이기에,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있더라도 내가 가진 게 없다거나 혹은 아는 게 없다는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미국 대학원을 다니면서 느낀 건 미국은 표현을 하는 게 기본인 사회다. 말하고 틀리면 다시 정정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알맹이가 없이 겉도는 이야기들을 하기도 한다. 그 말을 안 하면 자기가 생각을 안 한다고 생각할까 봐 그러는지, 무엇이라도 꼭 이야기를 하더라. 가끔 수업시간에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얘 논문 안 읽었는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나라면 조용히 있을 거 같은데 그래도 뭐라도 꼭 말을 한다. 이런 걸 보면 오기 전에 미국 사람들은 말을 안 하면 ‘모른다, 생각이 없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고 들었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교육 쪽 연구를 하면서도 저렇게 ‘말 없는 애 = 생각 없는 애’라는 그 동네 사람들의 생각을 느끼기도 한다. 연구라서 그렇겠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표현에 기대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은 어떤 것 X의 증거‘가 된다. (X는 어떠한 말이냐에 따라서 생각, 어려움, 질문 등등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명제의 이는 독립적인 Truth value를 갖는다. 다시 말해, ’ 말을 안 하는 것은 X가 없다는 증거‘라는 말이 참일지 거짓일지는 모른다는 건데, 가끔 말을 안 하는 것이 무응답을 넘어 어떠한 의미를 갖게 해석될 뻔하는 경우들이 있다. 나 혼자만 아시안이었던 교육 쪽 연구팀에서도 초반에 학생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 번 짚고 넘어간 기억이 있다. 그저 우리는 그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뿐이라고. That’s it. No more than that. 연구를 하다 보면 표현을 해주지 않으면 연구자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동시에 연구 결과들이 외향적인 사람들, 표현하는 게 쉬운 사람들의 성향이 더더욱 대표적인 혹은 전형적인 케이스로 굳어가고, 내향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남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향인인 나의 마음은 답답해졌다.

이렇게 외향적인 것을 선호하는 사회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루는 학회에 가서 로비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셜, 네트워킹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가는 세부학회는 알코올이 꽤나 빈번하게 등장하고, 그 세부전공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들 다수가 그 술자리에 다 있었다. 나는 친한 친구들하고 한두 잔 먹는 거 말고는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 목소리가 큰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기가 쭉쭉 빨리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한 참 쳐다보고 있다가, 옆에 있던 지도교수님한테 말했다.


나는 저기에 낄 자신이 없는 거 같아



그랬더니 교수님이 해주셨던 말.


왜 저기에 껴야 한다고 생각해? 네가 원하지 않으면 그럴 필요 없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기 있는 사람들 모두와
friend가 될 필요는 없어. 나도 대다수를 알지만 저기에 내가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거 같아?

나는 다수에게 friendly 하지만
모두의 친구는 아냐.

너는 그저 friendly 하기만 하면 돼. “


친구가 될 필요 없이 친절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더 가볍다. 물론 내향인에게는 다수에게 friendly 하는 것조차 에너지가 많이 들지만, 더 다양한 감정과 에너지가 오가는 friend보다는 낫다.


이제는 너무 무리해서 다가가려고 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감정만을 소모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과 친구가 되려는 노력 대신에 적당히 약한 연결고리만을 두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나’와 시간을 보내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다.



내향인이 학회를 보내는 방법


이러한 마음가짐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학회를 덜 스트레스받으면서 보내는 방법이 생겼다.


나는 미리 학회 프로그램 북을 쭉 보고, 내가 이번 학회에서 말해보고 싶은 사람 (친구들 빼고) 2-3명을 고른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일 때도 있고, 비슷한 분야를 하는 사람일 때도 있다.


그 사람들의 논문들을 읽어보고 나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학회에서 그 사람을 찾아서 말을 걸거나, 아니면 학회 전에 이메일을 보내서 어느 시간에 보자고 약속을 잡는다.


학회 전에 이메일을 보내서 시간을 조율하기에는 내가 프로그램북을 공들여 보는 것은 학회 당일이기도 하고, 여전히 콜드이메일을 쓰는 건 어쩐지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라 나는 전자를 선호한다.

(아마 내가 주로 가는 학회가 작아서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학회 중에 로비에서 앉아서 사람들의 흐름을 보다가

그 사람에게 적당히 가서 말을 건다. 아니면 식사시간 같은 경우에 옆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내가 당신의 논문을 정말 인상 깊게 읽었다. 여기서 보게 되어 기쁘다. 나도 비슷한 관심사가 있는데, 논문을 읽다 생긴 질문이 몇 개 있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면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대충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이미 선약이 있는 경우 다른 시간으로 그 자리에서 잡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수가 자신의 연구에 가치를 많이 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화에 응해주고는 한다.


그렇게 내 발표, 내가 목표했던 사람들 몇 명과 대화를 하고 난 뒤 나는 학회는 흘러가는 대로 두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다.


나랑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이 내게 먼저 와서 말을 걸면 대화를 하기도 하고, 아니면 저녁에 있는 보드게임이나 개더링은 마음 내키면 가고 아니면 만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보낸다.


모두와 친구가 되는 것도 대화를 하는 것도 힘들고, 1:1로 대화하는 걸 더 선호하는 내 성향에 맞춘 방법이다.

친구들하고 교수님들을 보다 보면, 본인의 연구가 가치가 있고 끈끈하게 협업하는 콜라보레이터가 몇 명 있다면 (그리고 그 콜라보레이터들이 활발하다면 더더욱 좋지만) 다들 학계에서 잘 살아남는다는 것을 느낀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외향적인 사람들일 것 같지만 생각보다 내향적인 사람들도 많고, 그들도 본인들의 방법으로 다들 살아남더라.


내향적인 것도 미국에서 그렇게 외치는 다양성의 하나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그냥 성향이 다른거다. 그래서 요새 연구할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해야하는 구어적인 표현말고 다른 방식으로도 학생들의 경험들에 배우고 연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작은 노력의 하나지만, 조금씩 더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 외향인들만 있으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힘들지 않을까?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내향인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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