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바로 보는 삶
이 질문을 해도 될까?
그러면 내가 바보같이 보이는 건 아닐까?
저 사람 기분이 상하는 건 아닐까?
그날도 여지없이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 말을 들으면서 이런저런 질문들이 생각났지만, 질문을 속으로만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나의 질문들이 내 표정에서 드러났나 보다. 무언가 불만족스러웠던 눈빛을 본 교수님은 그날도 같은 말을 했다.
What’s your question? Feel free to ask.
그렇게 말씀해 주셨음에도 나는 머뭇거렸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자, 그날은 교수님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적은 너야.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도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지 말고
그냥 물어봐.
내가 나의 적이라니. 생각해 보면, 내가 위에서 하던 저런 고민들은 “내”가 아니라 “남들이 바라보는 나”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워서 내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말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내게 주어질 수 있었던 배움의 기회를 내가 내 손으로 닫고 있었던 거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살았다. 아마도 늘 경쟁하면서 서로 비교하면서 살아야 하는 내가 지내온 한국 사회의 특성과 나의 환경, 그리고 나의 기질이 맞물렸던 것 같다. 내가 있었던 많은 교실을 생각해 보면 한 학생이 맞는 대답을 하면 그 학생에게 또래들이 “오-” 하는 감탄사를 보내고, 틀린 대답을 하게 되면 “우-” 혹은 “왜 나대냐”거나 낄낄 거리며 비웃는 모습을 쉽게 그릴 수 있다.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나라는 정답이 필요했고, 경쟁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과 늘 서열이 매겨지게 되기 쉽고, 평가에 예민해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랬으니까.
다른 사람이 틀린 답 혹은 다른 생각을 말했을 때 야유를 겪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입은 더 무겁게 닫히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보 같다고’ 혹은 ’ 공부 잘 못하네 ‘ ’ 별거 아니네 ‘ 이렇게 생각하는 게 싫었다. 그러면 꼭 내 힘 혹은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실수하는 나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내가,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에 왔다. 그리고, 몸에 밴 나의 ‘사회적 서열’ 레이더는 내가 꽤나 이 사회에서 낮은 곳에 있다고 신호를 준다. 심지어 이제는 언어도 낯설다. ‘서열’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인 게 너무 당연한데, 모르는 걸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어디선가 누군가 야유를 보낼 것만 같았고, 내가 더 만만해 보일 것만 같았다. 입을 닫는 게 나의 방어기제였던 거다.
교수님을 대할 때도 그런 자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수님이 데리고 있는 학생들 중에 내가 제일 못할까 봐 내가 제일 멍청할까 봐 걱정이 됐다. 그래서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무서웠다. ‘늘 잘하는 우리 딸’ ‘늘 잘하는 황지혜’였어야 했던 것이 물 위로 올라가려는 내 발목을 잡고 숨을 참게 만들었다. 그렇게 숨을 참고 참다 보면 결국 숨이 막히고, 모자라게 되어 지쳐 가라앉는 건데.
아직 잘 모르니까 학생인 거다. 더 배우려고 대학원에 가는 건데, 왜 다 알아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누군가에게 평가를 당하고, 그 평가를 인식하고 사느라 내가 답답한 것을 모르는 체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게 내가 더 많이 배우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걸 방해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내가 내 입을 막으면,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지는 못한다. 그래도 그 뒤로부터는 노력을 했다. 일단 시작은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부터. 일단 내 지도교수님은 나의 학문적인 상태에 제일 알아야 하는 사람이고,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교수님과의 일대일 미팅에서부터 시작했다. 교수님이 하는 말에서 모르는 단어나 어휘가 나오면 ‘그건 무슨 뜻이야?’라고 물었다. 그리고 학술적인 이야기를 하다가도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으면 이야기를 하고, 내가 이해를 잘한 것인지 모르겠을 때는 ‘내가 이렇게 이해를 했는데, 이게 맞아?’라고 물어보며 확인했다. 어쩌면 남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너무 쉬운 일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지도교수님이 몇 차례나
너도 어딘가에서 Vulnerable 해질 수 있는 사람은 있어야지.
라고 말해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계속 용기 내서 질문하고 그러한 과정이 편해질 수 있게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렴, 내가 2n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사람이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에 더해, 누군가에게 요청 혹은 부탁을 할 때에도 물어보는 게 어려웠다. 요청을 하고 부탁을 할 때도
아 저 사람 지금 너무 바쁠 것 같은데.
내가 이런 부탁을 해도 될까?
저 사람이 거절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을 했다. 여기서도 나는 비슷한 고민을 했다. 저 사람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내가 지도교수님한테 어떤 부탁을 하려고 할 때 머뭇거리니까, 다른 교수님이 해준 말이 있다.
How would you know Shiv’s availability?
Just ask.
Then, Shiv will tell you if he can do it or not.
That’s his call, not yours.
If he can’t, he will tell you that he can’t.
If you make the decision not to ask guessing his availability,
then it is like you are not respecting him
as an adult to make such a decision by himself.
저 사람이 바쁜지 아닌지, 상황이 어떤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물어봐. 그 사람의 몫까지 네가 알아서 결정하려고 하지 마. 안되면 안 된다고 하겠지. 네가 섣부르게 추측해서 결정하면 그건 네가 그 사람이 그런 결정도 스스로 못하는 사람 취급을 하는 거야.
이런 건 정말 상상도 못 한 생각이었다. 내가 이런저런 이유로 추측해서 보내는 건 그 사람 대신에 결정을 하는 월권이라니. 그 사람한테 물어보고 그 사람이 결정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 사람의 결정권을 존중해 주는 것이라니. 그 사람하고 나는 다른 사람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과 자원들과 그 사람의 그것들이 다를 텐데 내가 예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험 상 그렇게 결정을 대신 알아서 잘하고 스스로 갈무리해서 요청할 거 하고 안 할 거 안 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권을 내어주는 조금 덜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가엾이 여기고 결정을 대신해주자.)
그리고 내가 무서웠던 것은 ‘거절당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요청에 대한 거절을 ‘나’에 대한 거절로 느꼈던 것 같다. 그냥, 그 사람이 그때 시간이 안되니까 여력이 안되니까 ‘그 일’을 거절한 거다. 나랑 그 사람 사이에는 아-무 문제도 없을 수 있다. ‘나’와 ‘내가 한 말/요청‘등에 대한 분리는 참 중요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써보고 싶은 이야기다. 그리고 이 ’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운 것의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거절당할 확률을 0으로 만들기 위해 묻지 않으면 1%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을 ‘허락받을 확률‘도 같이 0이 되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느라 요청을 넣지 않는 것은 첫째로 묻지 않았으니 허락받을 일도 없는 나에게도 손해고, 둘째로 (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되니 그것도 문제가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요청하고 부탁을 하기 쉬워진다고 느꼈다.
오늘은 이렇게 ‘내가 나의 가장 큰 적‘이 되는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아직은 극복해 나가는 중이지만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편한 환경에서부터 조금씩 노력을 질문도 하고 부탁도 하는 그런 연습을 “나의 성장을 위해” 해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