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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감자 Mar 04. 2022

백수의 하루

가장의 무게를 아내에게 가볍게 토스! ep.4




다들 백수라고 하면 마냥 뭉그적뭉그적 느지막이 일어나 느릿느릿 아점 챙겨 먹고 누워서 낄낄대면서 유튜브랑 넷플릭스 보고 졸리면 낮잠 자고 저녁 되면 밥 먹고, 밥 먹다 술 생각나면 친구 불러서 술 한잔 하고 오고 하는 게 일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육아와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는 백수에게는 이러한 생활은 꿈과도 같다.


오늘도 퇴사를 꿈꾸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백수의 하루를 들려줄 테니 잘 들어보시길.



AM 7:00

금융권에 다니는 백수의 아내는 다른 회사원들보다 출근이 빠르다. 십 년이 넘도록 매일 같이 7시 전에 집을 나서니 정말 존경할 만하다. 내가 한창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자느라 아침에 출근하는 아내를 본 적이 별로 없다. 일이 바빠 늦게 돌아오는 때에는 아내가 먼저 잠들어 있기 때문에, 열흘 넘도록 한 집에 같이 살면서도 얼굴 보고 대화를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혼자 알아서 일어나서 조용히 출근하고, 혼자 퇴근해서 조용히 잠드는 게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난 퇴근이 없어졌고 아내에게 백수의 나태함을 보였다간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른다. 그녀를 불쾌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아내가 준비를 시작하는 6시 반에 나도 함께 눈을 뜬다.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일단 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아내가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을 때 아이들을 전부 깨워 현관 앞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외친다.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여보 파이팅!


AM 8:00

이제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챙겨주어야 한다. 나는 평생을 아침을 거르고 지내왔던 사람이지만 우리 아이들을 굶길 수는 없다. 아침은 거의 정해져 있다. 시리얼, 식빵과 에그 마요, 주먹밥, 에그 스크램블을 매일 번갈아가면서 준비해준다. 가끔 첫째와 둘째의 요구사항이 다를 경우, 미안하지만 그나마 말이 통하는 첫째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둘의 메뉴가 달라선 안된다. 품이 많이 드는 건 아니지만 아침부터 손이 두 번 가는 번거로운 일은 사양이다.


AM 9:00

겨울방학이라 아이들은 여유롭다. 그동안에는 방학 때에도 무조건 돌봄 교실을 보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방학이란 개념이 없었고, 돌봄 교실에서 책 읽으면서 방학을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방학이란 것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기에 나의 백수생활이 아이들에겐 처음으로 누리는 방학인 셈이다. 이 생각을 하면 아이들에게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더욱 마음껏 방학을 즐기게 해주고 싶지만 난 어지럽히는 족족 아이들에게 정리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AM 10:30

집을 치우고, 설거지, 빨래를 하고 나니 첫째가 학원에 갈 시간이다. 서둘러 양세로(양치, 세수, 로션)를 시키고, 옷을 입히고, 잠마신엘(점퍼, 마스크, 신발, 엘리베이터 버튼)을 시킨다. 내가 개발한 줄임말은 은근히 편하다. 몇 번에 걸쳐 잔소리할 것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다. 양치했어? 세수했어? 로션 발랐어?를 '양세로' 했어?로 한 번에. 모든 준비가 끝나면 둘째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함께 차에 태우고 첫째를 학원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온다.


AM 12:00

둘째와 점심을 먹는다. 요리를 전혀 못하는 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근처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점심거리를 잔뜩 사놓았다. 요리 흉내를 내보기도 하지만 간편식으로 먹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완벽한 육아를 위해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밥 먹을 자격이 없는 백수인 나는 다이어트라는 핑계 삼아 닭가슴살과 로메인으로 점심을 때운다. 실제로 아픈 허리 때문에 움직임이 적어 조금만 먹어도 살이 찌기 때문에 관리를 하긴 해야 한다.라고 위로한다.


PM 1:00

둘째의 공부시간이다. 수학 공부, 영어공부, 한글 공부 골고루 하지만 집중력이 아직 좋지 않다. 나도 참을성이 아직 좋지 않다. 상냥하게 가르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첫째는 알아서 잘 따라왔었는데 가수가 되고 싶은 둘째에게 공부는 쉽지 않다. 본인은 공부를 못하며 하기도 싫다는 자기주장이 확실한 7살의 둘째는 첫째보다 가르치기가 어렵다. 서로 화내고 짜증내고 웃고 울면서 공부하다가, 결국 놀이터에 나가는 조건으로 끝까지 마무리 짓는다.


PM 2:00

둘째와 놀이터에 나간다. 옷 입히기부터 전쟁이다. 주는 대로 입는 첫째와 달리 둘째는 옷 입히기부터 전쟁이다. 놀이터를 가는데 왜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거지? 추워도 괜찮으니 드레스를 입어야겠단다. 실랑이 끝에 결국 둘째의 승리. 모든 것을 포기한 나는 둘째를 두터운 패딩점퍼로 꽁꽁 싸서 입히고 놀이터에서 한 시간 넘게 놀아준다.(애초에 패딩점퍼 때문에 드레스는 보이지도 않는데 왜 입는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허리 아픈 나는 가장 괴로운 시간이고, 활발한 둘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PM 04:30

둘째가 학원에 가는 시간이다. 월수금은 발레, 화목은 미술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학원버스가 아파트 앞까지 와준다. 이제 둘째만 학원버스에 태우고 나면 드디어 자유시간이다. 뽀뽀 쪽! 하고 버스에 태워 보낸 후 나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고작 한 시간. 마음이 급하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신난다. 무얼 했는지 모르겠는데 한 시간이 벌써 지났다. 너무 허무하다.


PM 05:30

출근이 빠른 아내는 다행히 다른 회사들보다 퇴근도 빠르다. 아내의 퇴근시간이 되면 초조하다. 일단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킨다. 정리는 잘하는 탓에 집을 치울 것은 딱히 없지만 집을 한 번 훑어보면서 미진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다. 아내가 들어오는 순간에는 내 책상의 스탠드를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다. 무얼 했냐고 딱히 물어보진 않지만 무언가 열심히 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리고 백수가 된 이후로 한 번도 빠지지 않는 행동, 아내의 가방과 외투를 받아주는 것. 우리 집 가장에 대한 배려와 존경을 담은 최고의 제스처. 이 행동으로 아직까지 버티고 사는 느낌이다.


PM 06:00

아파트 정문으로 둘째를 모시러 간다.


PM 07:00

학원으로 첫째를 모시러 간다.



7시 이후로 끝이 아니다. 저녁도 먹이고, 씻기고, 책도 읽어줘야 하고, 같이 놀아주고 나면 밤 열 시가 훌쩍 지나간다. 더 이상 자세히 적어 내려 가다간 내가 숨을 못 쉴 거 같아서 이제 그만 써야겠다.


정말..


힘들다!


너무 힘들다!


장난이 아니다!


하루 종일 어지럽고 토할 거 같다!


가정주부에게 아이들의 방학이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 존경합니다!


세상의 모든 가정주부님들, 정말 존경합니다!!



*아이들 방학이 끝나 너무 기분이 좋아 쓴 글! 이제 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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