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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감자 Mar 11. 2022

백수라서 좋은 점

가장의 무게를 아내에게 가볍게 토스! ep.6


평소 게으르고 의지가 박약한 데다 그런 나를 너무 잘 아는 나는, 지난날에 미리 해놨으면 좋았을 것에 대해서  그다지 후회하는 편이 아니다. 시간을 되돌린대도 어차피 안 했을걸? 또 똑같이 놀고 뒹굴고 그랬을걸? 하면서 말이다. 그런 내가 딱 한 가지 후회하는 것이 있다.


ENGLISH

이놈은 내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놓질 않아, 학창 시절부터 나를 끝없이 괴롭히고 있다. 영어를 알아두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래서 꾸준히 공부해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도통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 마음의 커다란 짐. 20대 초반에는 노느라 공부할 시간 따위는 없었고, 20대 중반에는 영어권의 어학연수를 포기하고 일본과 중국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버렸으며, 30대에는 지금 당장 일하느라 공부할 여유가 없네, 라는 핑계로 20년의 시간을 여태껏 기초회화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배우 류준열 님

몇 년 전에 '트래블러'라는 제목의 쿠바 여행기를 담은 프로그램을 보는데 배우 류준열 님이 영어 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류준열 님의 영어는 매우 기본적인 단어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대화를 나누는 데에  거침이 없었고, 입으로 나오기까지 버퍼링이 없었으며, 발음이 출중하진 않았지만 촌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그 담백함과 당당함이 좋았다. 얼마나 공부해야 이 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는 감이 오질 않지만 딱 이 정도만큼 하고 싶었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간단한 단어와 문구를 적시에 활용하여 표현하고, 꼬부라지진 않지만 담백한 발음을 구사하는 것. 딱 이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얼마나 공부한 걸까? 이 정도만 하고 싶다..'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난 돈 버느라 바빴으니까.



영어 어플

침상 보존(우리 척추 환우들 사이에서 허리 통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여 침대에 거의 누워 생활하면서 회복을 기다리는 것)하는 동안 문득 영어공부를 시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평소의 나답지 않게 신속하게 몇 가지 어플 중 고민을 하다가 그중 하나를 다운받고 곧바로 일 년 치 결제까지 해버렸다.

기초 부분은 넘기고 대충 내 수준에 맞춰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완전 초보 강의부터 시작했다. 시간낭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보단 그냥 첫판부터 깨면서 가고 싶었다. 그렇게 매일 꾸준히 계속해오고 있다. 부담감 없이 일상의 루틴으로 삼아 공부를 하니 확실히 조금씩 느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지금도 녹음된 내 발음을 들어보면 정말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이고, 간단한 답변도 제대로 하질 못하고 무한 버퍼링이 시작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영어가 재밌고 더 잘하고 싶어진 적이 있을까? 할 정도로 매우 재밌게 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영어의 뒤죽박죽 된 지식을 정리하면서 이해를 하니 뭔가 더 쉬워진 거 같은 느낌이 들고, 왠지 잘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꾸준히 하면 외국인과 농담 따먹기가 가능해질 것 같다.



독서

침상 보존을 하는 동안에는 누워서 TV보는 것조차 목과 허리에 부담이 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가 않았다. 누워서 인스타그램을 쳐다보고 있으면 지금 내 상황과 비교하게 되면서 자꾸 자괴감만 들어 더이상 보기를 그만두었다. 그래서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어본 때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나는 나를 바꾸어보련다.  


일주일에 한 권씩 읽으려고 하는데 벌써 30권 정도를 읽었다. 40년 평생 읽은 책 보다 많다. 게다가 내가, 나란 녀석이, 나 같은 놈이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한다. 집 근처에 도서관에 가서 관심 있는 책을 고르고 아이들이 볼만한 책들과 함께 대여해온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내 모습이 너무 멋지다. 만화방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내가 책을 고르고 있다니. 내가 너무 대견하다. 시간을 허투루 버리지 않는 나를 칭찬하고 싶다. 게다가 그냥 읽고 끝내지 않고, 중요한 내용이나 귀감이 되는 내용, 도움이 되는 내용들은 따로 메모를 해 놓고 나중에 되짚어 볼 수 있도록 하는 기특한 짓도 하고 있다.


소설, 에세이, 자기 계발서를 번갈아가며 다양한 책을 접하고 있는데 각자 다 장점이 있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지금의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고, 은근 마음의 상처를 받아가고 있는 나의 마음을 작가들의 위로 섞인 에세이로 정화시킨다. 특히 회복 후에 나의 커리어를 위한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큰 도움을 받는다. 애초에 인맥이 많지 않은 나는 조언을 얻고 고민을 상담할 지인이 주변에 별로 없다. 하지만 책을 통해 이 부분들이 해결되어 간다. 세스 고딘에게 마케팅을 배우고, 배민 김봉진 대표에게 회사와 경영, 브랜딩에 대한 조언을 받는다.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독서를 하지 않은 내가 너무 미련하다고 느낀다. 독서의 중요성을 알려주려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시간을 마련해주었나 싶을 정도다.



이렇게 허리 아픈 틈을 이용해 인생숙원사업의 첫 삽을 뜨고 있는 때에, 영어 어플 공식 메일로부터 아이패드에 당첨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내가 이용하고 있는 영어 어플은 한 달에 한 번씩 열심히 한 사람들을 추첨해서 선물을 보내주는데, 한 달 동안 3일 연속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브론즈, 7일 연속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실버, 14일 연속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골드로 구분되며, 브론즈 중에서 추첨하여 커피 쿠폰 정도의 선물, 실버에서 교육권 정도의 선물, 골드에서 두 명을 추첨하여 아이패드와 에어 팟 프로를 경품으로 준다. 내가 그 골드 1,179명 중에서 당첨된 것이다.


딥하게 우울해졌다가 풀렸다가를 반복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프레쉬한 성취감을 느끼게  주었다. 역시 사람은 도전하고 실행하면서 성장하는가 보다. 그러다 보면  상도 주고 그런가 보다. 내가 올리는 글들에 가끔 들어가는 정말 형편없고 허접한 그림들이 바로 경품으로 받은 아이패드로 그린 것들이다. 그림 그리는 것도 재밌어서 꾸준히 그려볼 셈이다. 슬램덩크 1권과 마지막권의 퀄리티가 다르듯  그림들도  성장할 것이니 너무 허접하다고 흉보지 말아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하는 것들이 백수이기에 가능한 것만이 아닌 거 같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충분히 할 수 있었고, 사업을 하는 동안에도 할 수 있었다.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습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백수라서 좋은 점은,
시간이 많아서 이것저것 다 해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것들과 필요한 것들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긍정의 삶의 태도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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