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무게를 아내에게 가볍게 토스! / 3
대학교에서 같은 학부, 다른 과의 그녀를 마주치고 첫눈에 느낌이 왔다. 그러고는 곧 군대에 갔다. 군 복무 당시에 부모님이 일본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그 덕분에 휴가를 일본으로 갈 수가 있었다.(출국심사대에서 엄청난 심문을 받아야만 했지만..) 마침 그녀도 일본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미리 네이트온을 통해 약속을 잡을 수 있었고, 드디어 일본에서 첫 데이트를 즐겼다.
특별한 느낌이었다. 난 군인의 신분이었고 그녀와는 채팅으로만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 만나서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여긴 일본이다. 군인이 해외로 휴가를 나와 관심에 두고 있던 여자와 데이트를 한다니 이건 거의 K-드라마 수준이다. 아버지에게 받은 용돈으로 회전초밥집에서 플렉스를 해버린 나는 그녀의 맘을 잡을 수 있었고, 군 제대 후 5년 연애 끝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
이렇게 만난 내 아내는 천생 여자다.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데에 거리낌 없이 솔직하고, 술을 좋아하고, 회식자리를 좋아하며, 웃음소리가 호탕하지만 그녀는 연약하고 조신한 천생 여자다. 천생 여자라는 말이 요새는 위험한 단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덧붙여 말하자면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여성스러운 여자라는 말이다. 청순가련형은 아니지만 조신하고, 마르지는 않았지만 연약하다.
그동안의 우리는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였다.
주말 아침, 아내가 주문한 20kg짜리 쌀이 왔다. 허리디스크로 무거운 짐을 들을 수 없는 상태의 나는 대략 난감해졌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은 남편의 몫. 우선 쌀 냉장고 앞까지는 끌어서 가져오긴 했는데, 이걸 도저히 한 번에 영차 하고 들어 올릴 자신이 없다. 나는 척추 위생을 지켜야 한다.(척추 위생이란 단어가 생소하겠지만 나와 같은 척추 환우들은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척추에 좋은 자세와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냥 쌀 냉장고에 넣지 말고 써야 하나? 주방이 지저분해 보일 텐데.. 그럼 환불을 하고 10kg짜리로 다시 살까? 10kg는 가능할 거 같은데 너무 번거로운걸.. 어떡하지.. 그래!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바가지로 옮겨 담자! 큰 위기를 영리한 머리와 도구로 해쳐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세탁기에서 세탁이 완료되었다는 벨이 울려 세탁실로 간다. 우리 집 세탁실은 세탁기와 건조기가 마주 보고 있는 구조로, 세탁기의 빨래를 꺼내 반대편의 건조기로 옮겨 담아야 한다. 무작정 다 때려 넣으면 안 된다. 우리 집은 속옷이나 홈웨어, 수건 정도만 건조기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건조대에 말린다.(그동안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이 분류작업을 허리를 숙인 채 하는 것은 척추 위생에 매우 안 좋기에 세탁실에 있던 목욕탕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작업에 착수한다.
할머니가 냇가에서 빨래하는 듯한 나의 뒷모습이 초라해 보였는지, 아니면 우스워 보였는지 아내는 갑자기 박장대소를 한다.
애쓴다 애써. 뭐라도
하겠다고 고군분투하네.
나는 이 말이 위로인지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가늠이 안되지만 아내가 웃었으니 일단 기분이 좋다.
주방에서 덩그러니 놓인 쌀을 발견한 아내는 나와 쌀을 번갈아 쳐다본다. 뭔가 결심을 했는지 가위를 가져와 쌀자루의 모서리를 자른다. 그리고 상대방의 유도복을 꽉 쥐듯, 쌀자루를 쥐더니 번쩍 들어 쌀통에 옮겨 담는다. 이걸 어떻게 옮겨야하나 하는 잠시 동안의 고민과 체증이 쓸어내려가듯이 쌀이 쏴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쌀 냉장고로 들어간다.
약간 낑낑대긴 했으나 거의 '번쩍'에 가까웠다.
아내에게 이런 힘이 존재했었나?
그동안 본인의 파워를 숨기고 산건가?
평생 처음 본 듬직한 아내의 뒷모습이었다.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아내에게 평생 충성을 다하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아내는 돈도 벌고 힘도 센, 나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존재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아내가 나를 먹여 살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동갑내기 커플로 자연스레 나보다 빨리 회사에 취직한 아내는 내가 취업활동을 할 당시에도 나를 먹여 살렸다. 여보.. 이건 운명이라 생각해..
음.. 난 목숨 바쳐 아내를 받들어 모시며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