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장미 문양 안락의자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에 남는 동화책이 있다. 나한테는 그 책이 베라 윌리엄스 저자의 '엄마의 의자’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주인공과 엄마가 동전을 모아서 엄마의 의자를 산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엄마의 식당에서 팁으로 받은 동전들을 유리병에 하나씩 모은다. 엄마가 다리 올려놓고 쉴 수 있는 푹신한 안락의자를 사기 위해서다. 마지막에 동전들이 다 차게 되고 엄마와 함께 마음에 쏙 드는 안락의자를 사게 된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맘에 들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표지에 있는 빨간 색깔의 안락의자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안락의자를 사고야마는 주인공의 의지가 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주인공의 집에 작년에 불이 났었는데 이때 이웃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가구들을 가져와 돕는 모습에 정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거리를 지나가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안마의자를 바라본다. 제품의 이름도 제품의 겉모습에 걸맞게 눈길을 끈다.
'파라오’ 라던가.
집에 하나 놓는 게 요즘에는 새로운 유행이 된 모양이다. 진열된 상품들을 보니 하나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쓱 쳐다보고 가던 길을 재촉한다.
우리는 우리의 다리 올리고 편히 쉴 만한
자신만의 안락의자가 있을까?
엄마가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엄마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방 한 개가 오롯이 엄마의 물건들로 채워졌다. 엄마의 데스크톱, 엄마의 노트북 그리고 엄마의 책장까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우리 엄마는 맥시멀 리스트인가 아니면 슈퍼 파워 울트라 맥시멀 리스트인가’
한편에 놓인 안마의자가 보인다.
심란하다.
안마의자 위에 올려진 가방과 외투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안마기로 사용을 하기는 하나 싶은 의문이 들지만 이내 시선을 거둔다.
이 공간에 옷걸이로 사용되는 안마의자 대신에 엄마가 쉴 제대로 된 의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동안 분주하게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지친 다리를 올려놓고 편히 쉴 안락의자.
엄마를 위한 의자. 엄마만의 의자를.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엄마가 일을 나갔을 때, 학교를 갔다가 돌아오면 이미 지고 있는 햇빛이 비추는, 아무도 없는,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신발장.
집에 돌아가면 항상 아무도 없어서
마음이 쿵하고 매일 내려앉았던 그 시절.
면접을 본 후 13년간 집에만 있던 주부에게 원장님 자릴 맡겼다며 설레 하던 엄마를 축하했지만, 매일 집에 혼자 있을 때마다 난 외롭고, 힘들었고, 미웠고, 원망하고, 분노에 가득 찼다.
오후 3시에 집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고 쓸데없는 영상들을 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배가 고파서 콘프로스트를 먹었다.
엄마의 그때 나이 43세.
아직 한창 자신의 인생을 일구어갈 나이.
그리고 엄마에게도 처음 맞는 나이.
중학교 1학년인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축하하며 속으로는 원망했었다.
13년간 나에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엄마.
“사람이 한 가지 일을 10년을 하면 그것이 강점이 된다는데, 엄마는 나에 있어서는 한참 전문 가였겠구나. 엄마의 꽃다운 30대를 나에게 쏟았구나. 나는 엄마의 걸작이구나.”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을 때.
엄마에게 더 좋은, 더 멋진, 다른 사람에게 떵떵 거리며 자랑할만한 딸이 되지 못한 내가 실망스러웠고 미안하고 원망스러웠다.
왜 그땐 몰랐을까. 왜 원망하기만 했을까.
나의 20대, 30대, 40대가 이렇게 소중한 줄 알았으면 엄마의 시대도 존중해야 마땅한 것을.
‘엄마’라는 말의 무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이 나게 함과 동시에 상상할 수도 없게 그 존재의 가치를 무시하게끔 만든다.
1톤의 무게와 동시에 100g.
‘엄마’에게 함부로 말했던 시간들과 동시에 ‘엄마’만이 내 전부였던 시간들.
엄마에게 난 현재 뭘까?
나에게 엄마란 현재 무슨 존재일까?
나와 함께 가는 모든 것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겠냐만은 가끔씩은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나를 완성시킨다. 내가 선택해왔던 내 옆을 지나갔던 모든 물건들이 내 안에 살고 있다. 어렸을 때 읽은 이 동화책도 나를 완성시키는 물건 중에 하나다.
엄마의 안마의자를 쳐다본다.
오늘은 빨래가 널려져 있다.
한숨이 새어져 나온다.
'엄마의 의자’라는 동화책에서 주인공의 집에 불이 났을 때 이웃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가구를 하나씩 가져와서 주인공의 빈집을 채워주는 장면이 있다. 그 후로 1년이 지난 뒤 주인공은 동전들을 유리병에 모아서 엄마가 쉴 수 있는 장미 문양의 빨간색 안락의자를 산다.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을까? 돈으로는 이 세상의 것을 다 살 수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세상에는 돈으로는 나를 채우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왕 돈을 쓸 거면 나를 완성시킬 수 있는 선택을 하기로 한다.
집으로 오는 길에 큰 유리병을 하나 샀다.
동화책의 주인공처럼 1년 안에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엄마가 진정으로 쉴 수 있는 ‘엄마의 의자’를 함께 웃으며 고르고 사는 그날을 기대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했었던 그때의 나를
용서할 수 있기를.
짤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