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와 현서의 이야기-18
너와 나의 시계는 다르다
현서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같이여서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모두 거짓이 된 것 같았다. 자신이 내어준 배려도 사랑도 정성도 한순간에 구겨져 버려지는 쓰레기 같았다. 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진심이지? 그래 잘 알았어."
현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연우에게서 멀어졌다. 연우는 그런 현서를 잡지도, 바라보지도 않았다.
'아... 싸우는 거 진짜 싫다.. 지긋지긋해.'
연우는 흥분하면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말을 상대방에게 쏟아내는 자신의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싸움이 나면 더욱 입을 닫고 열지 않았다.
첫 번째 연애에서 불같은 사랑을 하고, 욕심이 많던 그 사람에게 이별을 말하고 나서도, 자존심 때문에
괜찮은 척하며 자신의 감정을 낭비하지 않으려 했던 연우다. 매일 챙겨주는 현서의 문자가 고맙고, 현서의 세심한 배려 때문에 마음을 열어놓고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상처를 냈다.
'난 미안하다는 말이 왜 이렇게 하기 어려울까...'
연우는 자존심 내세울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 드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현서는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연우의 연락처를 지우고,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진들도 주저 없이 삭제했다.
'내 머릿속에서도 지워졌으면 좋겠다...'
버스 창문 너머로 핑크색인 듯 보라색인듯한 저녁 하늘이 보인다. 현서의 눈에 아직도 세상은 아름다워 보이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널 위한 거짓말이라니... 그런 게... 어딨어...'
처음 하는 사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모든 것을 내어주고, 보여주고, 표현했다. 긴장감이 없어도 지루하지 않았고, 그저 편안하기만 했다. 자신과 달랐던 연우가 호기심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이끌리게 했고, 사랑이라 믿게 됐다. 현서의 첫 번째 연애는 그랬다.
일주일이 지났다.
연우의 핸드폰은 이별 이후 할 일이 없었다. 좋은 아침을 알리는 문자도, 아쉬워하며 사랑해 잘 자를 수도 없이 남겼던 문자도 사라졌다. 현서가 그동안 보낸 문자와 함께 찍은 사진은 핸드폰 속에 그대로였지만, 연우의 마음속에 현서는 없었다.
현서는 일주일 내내 과외도 미룬 채 학교에 가있는 시간을 빼고 가만히 누워만 지냈다.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연우가 생각났고, 연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게 화도 내 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우의 번호를 눌렀다가 취소를 누르는 일이 많았다. 행복했던 기억만큼 힘들어했다. 첫 번째 이별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슬픔과 괴로움을 모두 드러냈다.
또 일주일이 지났다.
실연의 아픔을 얼굴에 다 드러낸 채 과외를 마치고 돌아오던 현서가 맞은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연우를 발견했다.
창문에 비치는 그늘진 현서의 얼굴과 창문 너머 통화를 하며 웃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 닿았다.
현서는 자신을 볼까 두려워 고개를 돌렸다.
'난 왜 이렇게 아픈 걸까. 넌 웃고 있구나...'
가슴이 저려왔다. 웃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짜증이 났다.
'난 너에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게 맞는 걸까.'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머리도 마음도 모두 제멋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