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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을 하루 같이 사랑했던 부부,
함께 떠납니다

타코쓰보증후군

by 전지은



봄이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연초록의 색깔을 입은 산야가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새싹이 돋고 옅은 잎이 나고 꽃이 피면 짙은 초록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자연을 만든다. 그 자연의 조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정이라는 조화로운 화단을 가꾸고 싶어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얼었던 계절이 풀리자 움츠렸던 마음도 푸근해지며 그의 어깨에 기대고 싶었다. 일 년쯤 만났던 이와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오갔고 봄꽃처럼 아름다운 신부가 되고 싶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인터넷이 없었으므로 잡지나 사진 등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당시 봄의 결혼식 중 가장 많이 회자되던 영국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의 결혼식을 보며 나는 황홀해했다. 대리 만족이겠지만 케이트의 부케와 웨딩드레스를 보며 한창 달떴던 시간들.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고, 40년의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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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봄에 만났던 환자는 여든다섯의 할머니 유방암 환자였다. 암이 장으로 전이되어 복강 내 장기들을 모두 누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개복수술로 전이되어 있던 암까지 제거한 상태였다.


가족들 말로는 환자 본인은 수술을 받지 않고 편안한 임종을 원했지만 할아버지가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보자고 간곡하게 부탁하여 수술했다고 한다. 유방 절제술은 물론 이어지는 항암 요법과 방사선 치료들로 기력이 쇠진할 대로 쇠진해진 할머니는 더 이상 병마와 싸우기엔 힘에 부쳤지만 남편이 간절히 원하니 다시 수술을 승낙한 것이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수술 후 하루 만에 인공호흡기를 떼었고 경과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집도의는 종양을 거의 전부를 적출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수술하지 않았으면 얼마 견디지 못했을 시간을 수술로 좀 더 연장한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할머니가 뇌졸중 증상을 보였다. 갑자기 말을 못 하고, 마비 증상까지 보였다. 급하게 CT를 찍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혈전성 뇌경색이었다. 간단한 수술도 아니고 복강 전체를 들어내 암이 퍼진 부분들은 잘라내고 꿰맨 직후였으므로 혈전을 녹이는 혈액 용해제도 투여할 수 없었다. 혈전 용해제를 투여하면 꿰맨 상처 부위에서 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24시간이 지나도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큰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엄마에게 임종 간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방금 수술이 끝났는데 좀 빠르지 않나요? 혹 본인이 원했다면 모르지만.”


“사실 수술 전 엄마는 임종 간호를 원했어요. 살만큼 살았는데 편안하게 가고 싶다고요. 수술은 잘 끝났지만 합병증이 심각하잖아요. 우리 엄만 수술을 원하지 않았거든요.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수술을 받은 거죠. 아버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엄마를 살리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없이…….”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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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말기 암 환자인 경우 대개 의사가 환자와 가족의 의견을 먼저 묻는다. 편안하게 임종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생명 연장을 원하는지. 개인의 종교와 믿음의 차이들로 답은 각각 다르지만 의료 팀은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여 치료 계획을 세운다.


임종 간호는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하나로 선택은 환자와 가족들의 몫이다. 할머니의 선택은 임종 간호였고 할아버지의 선택은 생명을 연장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늘 할아버지의 의견을 따랐다. 할머니는 유방암인 것을 알고는 견디기 힘든 수술과 치료를 받는 중에 딸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편안하게 가고 싶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너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잘 살았는데 이제 더 이상 뭘 바라겠니.”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차마 남편에게는 하지 못했다. 남편의 간곡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 역시 아버지에게 이 말을 전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머니를 살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사랑하는 할머니를 보낼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치료를 수용했지만 대수술 후 예후는 급격히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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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일단 다른 가족들은 빠지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모두 당신 책임이라며 힘들어할 수도 있는데 가족이 그런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감정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예후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셨으니 이제 할머니가 편안하실 수 있게 놓아 드리면 어떨까요?"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더 힘들게만 한 것 같네. 그렇게 수술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말이지.”


“그래도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나는 거칠고 두툼한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손은 참 따듯했다. 우리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가망은 없지?”


“죄송하지만 그래요.”


“알았어.”


할아버지와 생각보다 쉽게 이야기가 풀렸다. 우리는 다른 가족과 모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할아버지, 임종 간호사, 원목, 모든 가족 그리고 나는 두 시간 후 다시 모이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나갔고, 난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 시간을 알렸다. 할아버지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언질도 잊지 않았다. 딸은 마음이 가벼워졌다며 고맙다고 했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회의실로 들어가는데 응급용 원내 방송이 연거푸 이어졌다.


“코드 블루, 병원 입구 주차장! 코드 블루, 병원 입구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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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블루는 병원 내에서 누군가 심장마비 등으로 갑자기 의식의 잃고 쓰러졌을 때 원내 방송에서 쓰는 응급용 신호다. 나는 누군가에게 발생한 응급 상황으로 생각하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3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딸의 전화기가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할아버지가 주차장에서 쓰러졌단다. 좀 전에 들었던 코드블루를 발령시킨 응급 환자가 바로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가족들은 서둘러 응급실로 달려갔다.


할아버지의 병명은 주로 심장마비 증상을 보이는 타코쓰보 증후군이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사랑이 깨어져 죽을 것 같은 심정의 급격한 스트레스 상황이 왔을 때 생기는 상심증후군으로 일본 의사에 의해 처음 이름이 붙여졌다. 보통 젊은 여성들에게서 많이 발병되는 이 증상이 할아버지에게 나타난 것이다.


약속은 자연히 미루어졌다. 퇴근 시간쯤에 할아버지가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할머니의 바로 옆방이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인공호흡기가 필요 없었고, 심장박동 수와 혈압을 조절하는 약만 공급받고 있었다.


다음 날, 임종 간호사가 할머니를 방문하기 직전에 할아버지가 나를 찾았다.


“우리 둘을 호스피스 병원으로 보내 줘, 가능하면 같은 방을 쓸 수 있게 해 주고. 내 아내가 맞고 있는 모든 약물을 제거하고, 내가 맞고 있는 모든 약물도 제거해 줘. 둘 다 고통받지 않게 가끔 진통제만 주면 돼. 아이들을 다 모이라고 해. 우리 부부의 일은 우리 둘이 결정할 거야. 알았지?"


“할아버지, 가족들을 부를게요.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말씀하세요. 잠시 기다리세요.”


할아버지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또박또박 당신의 뜻을 전했다. 큰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아버지, 진정 원하시는 거죠? 그게 두 분의 뜻이라면 그렇게 해 드려야지요. 후회하지 않게 잘 생각해 보세요. 급하게 결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상태가 이렇게 나빠진 게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엄마가 돌아가시면 혼자 남을 생각에 힘드시기도 한 것 같고요. 그것이 아버지 뜻이라면 따를게요. 60년 넘게 함께 있었는데 그렇게 오랜 사랑과 이별하자니 얼마나 힘드실까요. 가는 길까지 함께하고 싶을 만큼 각별하셨던 거죠.”


호스피스 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부부가 쓸 수 있는 방이 있는지 문의했다. 대개는 독방이지만 침상을 하나 더 들이겠다고 한다. 구급차 회사에도 문의했다.


“두 사람이 함께 구급차를 타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갈 수 있나요?”


그쪽에서 잘 못 알아듣는다. 한 구급차를 두 명이 탈 수 있는지를 물어보자, 규정상 함께 타는 것은 안 되고 동시에 구급차 두 대를 보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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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스피스 병원으로 떠났다. 다른 주에서 달려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기다려 줄 시간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함께 떠나가는 길이 편안해 보였다.


두 분을 떠나보내며 결혼 40년이 넘은 내 모습을 되돌아본다. 연애할 적에는 뜨겁게 사랑했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살갑지 못했다. 지금은 고백하건대 독불장군이다. 무엇이든 내 마음에 들어야 하고, 내 답은 늘 정답이고, 내 목소리는 언제나 그이보다 한 톤 높다.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알래스카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가도 가도 이어지는 너른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동안 나를 견뎌 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긴 세월 동안 나를 견뎌 준 남자. 한때의 열정이 식었다고 해도 언제나 내 곁을 지키는 동반자. 세상에서 최고로 편한 남자. 누가 뭐라 해도 언제나 내편인 한 사람. 누군가 사랑이 식거나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왜 계속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결혼은 ‘함께 손잡고 영원히 가는 평행선’이라고.


며칠 후 동네 일간지에 두 노인의 사진이 실렸다. 아들과 딸이 둘의 일생을 추억하며 ‘60년 동안 평생을 하루 같이 사랑했던 부부, 함께 떠납니다’라고 애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분의 사망 일시는 같은 날, 불과 두 시간 차이였다. 서로의 빈자리가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그 각별하고 영원한 사랑이 서로의 빈자리를 잠시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신문의 부고란을 읽으면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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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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