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슴으로 낳은 딸

by 전지은



앤절라는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닮았다. 반짝거리는 검은 머리와 검고 짙은 눈썹 때문인지 얼굴은 더 두드러지게 하얗다.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녀는 중환자실 내에서 ‘미스 도미니칸(Dominican)’으로 통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미스 유니버스라고 부르듯이, 병원 이름 도미니칸을 붙인 별칭이다. 그랬던 그녀가 얼마 전부터 우울한 표정이더니 급기야는 일하면서도 눈물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지만, 물어보는 것조차 그녀의 울음보를 건드리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InnerShe_Loss-of-a-partner-1.jpg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장기 휴가가 필요하다며 안식년을 신청했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미국에서는 한 직장에서 10년 이상 근속하면 일 년 정도 안식년이 주어진다. 어머니가 무릎 수술 후, 통증이 지속돼 앤절라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단다. 일이 끝나고 퇴근하면 자신의 몸도 천근만근인데, 어머니 간호까지 해야 하고 낮에는 어머니 혼자 집에 계시니 불안하고 걱정도 된단다.


가정 방문 간호사를 고용했지만, 메디케어에서는 방문 간호 시간을 2시간으로 제한하여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혼자 계셔야 했고 또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앤절라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어머니가 혼자 생활이 가능할 때까지 자신이 돌봐야겠다고 안식년을 낸 것이다.


“일하면서도 집에 계신 어머니가 걱정돼서 좌불안석이야. 우리 하는 일이 일분일초도 눈을 뗄 수 없는 중환자를 돌보는 일인데, 혹 실수라도 한다면 큰일이잖아. 어머니가 혼자 생활이 가능할 때까지 내가 돌보는 게 최선인 것 같아.”


그녀와 나는 홀어머니에 무남독녀인 동병상련이라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에선 좀 개방적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앤절라가 대학교 1학년일 때, 어머니는 매주 딸을 찾아가 주말을 같이 보냈다고 한다. 집과 학교의 거리는 운전하여 5시간이었다.


“내가 주말에 파티라도 가서 남자 만나고 술 마시고 놀까 봐 그랬을걸?”


“그렇다고 안 하니? 할 건 다 하지.”


우리 둘은 낄낄거렸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최대한 집에서 먼 곳으로 취직하려 했으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혼기도 놓쳐 아직도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때론 친구 같고, 언니 같고, 동생 같이, 서로에게 응석받이가 되어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머니는 퇴행성 관절염이 심해졌고, 수술했고, 재활이 용이치 않아 급기야는 딸의 간호를 24시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사실 앤절라는 어머니가 배 아파 낳은 딸이 아니었다. 가슴으로 낳은 딸. 어머니는 한 번도 결혼을 한 적이 없었고 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했었다. 남편이나 남자 친구보다는 딸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마흔이 되던 해에 입양했고, 그 후 둘은 떨어지지 않았다. 앤절라는 철이 든 후에 자신이 입양아임을 알았다. 친부모를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자기는 어머니가 하나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같이 살다 보면 비슷하게 닮아갈까, 아니면 어머니는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에 앤절라를 택했을까. 둘은 참 닮았다. 검은 머리와 짙은 눈썹, 흰 피부까지.


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간호는 지극했다. 칼같이 퇴근했고 퇴근 후에는 모든 간호를 도맡아 했다. 방문간호사와 24시간 가정 돌봄도 쓸 수 있는 의료 보험이 있었지만, 자신이 하는 게 제일 낫다며,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긴 병에 장사 없다고, 조금씩 힘에 부쳐서 이제 온전히 어머니만을 돌보겠단다. 효심 가득한 마음은 이해가 됐지만, 저러다 너무 지치면 어떡하나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한 번은 해 봐야 후회도 미련도 없을 일이니, 그녀에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benchempty.jpg



두 달쯤 지났을까, 앤절라가 다시 병원에 일하러 나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예정보다 빨리 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생각보다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지난 두 달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매일 싸웠어. 엄마는 아파서 못 움직인다고 하지, 난 재활을 위해 아파도 움직이라고 하지. 엄마는 먹고 싶은 대로 먹겠다고 하지, 난 칼슘이나 단백질 위주로 소식하라고 하지. 엄마는 나한테 제발 좀 나가서 돌아다니라고 하고, 난 엄마를 두고 어딜 가느냐고 되묻지. 정말 매일같이 다퉜고, 삐쳤고, 큰소리도 냈어. 간호는커녕,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더라고. 이건 아니다 싶었어. 나도 집에 계속 있는 것보다 일하는 게 낫겠고, 엄마도 내가 없어야 방문 간호사와 도우미 말을 듣겠더라고.”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피 한 방울 안 섞이고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심하게 싸우다가도 금세 화해하는 여느 모녀와 같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을 입양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해했다. 그래서 더 극진히 간호하고 싶었었는데, 자신도 사람인지라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며칠이 지나 앤절라는 토슈즈처럼 생긴 헌 실내화 하나를 가져왔다.


우리 엄마가 널 주래.”


“왜?”


“네가 외동딸인 걸 알았을 때부터 네가 제일 마음에 쓰였대. 신발 사이즈도 네게 제일 잘 맞을 것 같대. 이제 더는 이 신발로 이 방 저 방을 통통 튀듯이 다닐 수 없다는 걸 엄마도 아신 거지”


앤절라의 어머니는 재활을 하며 걷기에 안전한 운동화를 신어야 했다. 그 후 난 이사를 하며 짐 정리를 많이 했다. 버리고 또 버리고, 그녀가 준 실내화도 버려졌다. 실내화를 버리며 문득, 모녀 사이의 애증도 함께 버렸으면 싶었다.


앤절라와 나는 ‘너나 나나 엄마 그늘에서 옴짝 달짝을 못하고 살지’라는 이야기를 가끔 했다. 환갑이 지났어도 엄마에게는 빚진 듯한 마음이었다. 앤절라의 엄마는 앤절라를 입양해 홀로 키웠고, 우리 엄마는 혼자되어서도 재혼하지 않고 나를 키웠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엄마에게 너무도 커디란 빚을 지고 있다고도 했다. ‘엄마 말만 잘 들으면 매사가 형통’이라는 고색창연한 말을 앞세우는 엄마. 토 달지 않고 잘 따르다가도, 갑자기 성질이 나면 제일 만만한 상대인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말대꾸를 해서 엄마의 염장을 질렀던 우리였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랑이 족쇄가 되기도 하는,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함께하는 관계인 모녀지간.


나도 어느새 버릴 줄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추억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며 조금씩 사라지겠지. 떠나는 그날, 무엇에도 묶여 있지 않고 홀가분하고 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하나씩 정리를 해야겠다. 엄마와의 관계조차도.


나의 엄마도, 앤절라의 엄마도 이젠 스러지는 불꽃이 되어 요양원에 계신다. 얼굴 한번 보여 드리고 손 한번 잡아 드리면 검버섯이 핀 얼굴 위로 미소가 번진다. 그 미소는 호수처럼 잔잔한 은빛 파도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 같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인 것처럼.



istockphoto-1270768107-640x640.jpg





[책 보러가기]

그래도,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





keyword
이전 05화'혼자'와 '함께'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