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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Nov 23. 2022

그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이번 주 주제라는 <보글보글> 매거진의 공지를 보며 나도 참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처음 콜로라도 주로 이사를 왔던 20년 전.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었고 단지 남편의 직장이 새로 정해지며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남편은 그해 여름  혼자 먼저 왔고 나는 혼자 캘리포니아에 남아 집을 세주고 짐들을 정리했다. 한 곳에서 11년을 살았으니 쌓여 있던 짐은 많았고 더구나 아이의 유년기를 그곳에서 지나며 장난감부터 크기가 점점 늘어났던 옷가지들, 운동기구들 까지 짐은 무척 많았다. 차고 세일을 해 많은 것들을 처분하고, 구호물자를 받는 곳에 많은 양을 기부했어도 책은 버릴 수가 없었고, 아이의 추억들도 버릴 수가 없어 짐의 양은 그야말로 산더미 같았다. 이삿짐 센터를 부르고 트럭의 사이즈를 결정하며 우리의 짐이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한번 끌고 가보자, 하는 심정으로 그 많은 것들을 끌고 왔다. 마침 이사하던 날은 딱 지금처럼 추수감사절 이틀 전이였다. 새로 이사 올 집은 다행히 수납을 할 공간이 충분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트럭이 도착 한 날, 눈은 부슬부슬 오고 고요하기 만 한 새로운 곳에서 나와 남편은 짐을 풀기 시작했다. 추수감사절 이후까지 이어졌던 짐 풀기가 대충 끝나고 나서 이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일은 늘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이 공장장으로 있던 사업체는 그리 잘 되지 않았고, 어느 시간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성당에서 늘 만나던 3팀이 있었다. 우리 부부와 이곳에서 동네 신문을 발행하는 부부와 오랫동안 술가게를 했던 장사의 신이라 불리는 부부, 이렇게 3 부부였다. 주말이면 새벽 3-4시까지 술을 마시고 사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당에서 만났던 사람들이기에 무척 신뢰가 갔고, 특히 장사의 신은 그야말로 난전의 작은 좌판부터 시작해서 콜로라도의 최고 갑부라는 소리를 듣는 친구였다. 이곳의 물정에 어두운 우리들은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진로를 결정했다.

어느 주말 늦은 시간 우리 집에서 묵은 지 돼지고기 찜을 먹으며 했던 말, ‘형, 형수. 술 가게 한번 해봐요. 안되면 내가 되살게. 학사 위에 석사, 석사 위에 박사, 박사 위에 장사,인 거 몰라요? 형은 박사도 했으니 이젠 장사를 할 차례야’라며. 그날 밤에는 그 말을 웃으며 넘겼지만 다음날 숙취에서 깨자 우리 부부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번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곳까지 왔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다시 그 많은 짐들을 싸서 돌아가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도 않을 꺼란 생각도 들었다.


그가 알려준 몇 곳의 가게를 둘러보았고, 그중 한 곳을 사기로 했다. 자금이 충분하지 않아 고민을 했고 그는 종이쪽지 하나 안 받고 얼마의 자금을 융통해 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뭐라도 하나 써 드릴게. 사람 일 모르잖아.’  그는 진지하게 답했다. ‘형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니, 걱정 마시고 장사나 열심히 해 보셔요’. 고백컨데 그때의 마음은 그랬다. ‘박사 남편한테 장사시키는 것 같고, 내가 미국의 간호사인데 장사를 해?’ 하는. 마음속의 갈등은 ‘이것이 최선일까?’ 하는 것, 한동안 명치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술 가게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음속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리고 3개월 후, 그에게 말했다. ‘그 가게 자기한테 되팔지 않을 것 같아. ㅎㅎ 평생 월급쟁이만 하다가, 이게 웬일인지 모르겠네~ ㅎㅎㅎ’.

남편도 나도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했다. 남편은 공장이 잘 되도록 애쓰며 가게에 나왔고 나는 병원에서 퇴근을 하면 바로 가게로 달려갔다. 일 년 뒤, 남편은 공장에 투자했던 자금이 있었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나는 오랫동안 두 가지 일을 병행했고 가끔 글을 쓰기도 했다. 못 말리는 N 잡러였다. 싸울 시간이 없어 그 흔한 부부싸움 한번 못하면서 치열하게 살았다면 말이 될까.


뒤돌아보면 우리의 인생 터닝 포인트는 그가 했던 한마디이다. ‘박사 위에 장사 있다’는. 그리고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그가 하라는 대로 최선을 다했다. 작은 가게를 인수한 14개월 후, 그 가계의 3배만 한 곳으로 옮겨 갈 수 있었고, 그 후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우리들의 새 가게를 내는 일은 한 5년쯤 걸렸다. 가게를 빌리지 않고 내 것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은 ‘신 위에 건물 주, 있다’는 한국의 우스게 말을 새삼 알게 하는 일이다.  

요즈음은 가게를 아주 안 나가는 것은 아니고 바쁜 주말이나 연휴 때만 얼굴을 내민다. 오랫동안 일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일 중독 비슷한 것을 아주 버리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에서 많이 편해졌다. 세상과 소통하는 일과 세상 속에서 살아남는 일과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며 나의 궤적들을 되돌아본다. 이만큼 나이가 들었으니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자신을 내려놓고 현실과 마주했던 지난 15 여 년의 세월.


지금도 가끔 그들과 어울려 주말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옛날이야기를 나눈다. 작은 게으름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현실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결정해야 했던 그때의 용기,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무한의 신뢰, 명치끝에 달려 있던 그 한마디가, 그 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던지 무한반복으로 이야기한다. 밤새 나누던 이야기들은 훤하게 밝아 오는 창 밖으로 하얀 눈꽃이 되어 눈 부시게 만개하고 있다. 풍경 소리가 제법 크게 나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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