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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뮤엘 Jan 21. 2024

다큐 <조선인 여공의 노래> #02

근대 일본의 방적 산업과 조선인 여공들

조선인 여공의 노래 #02 



19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조선이 개방을 보류하며 쇄국정책을 펴고 있을 동안, 일본은 이미 1850년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본은 근대 국가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대 국가의 형성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기틀 중에 하나는 산업적인 발전이었다. 


1882년  일본 오사카 지역에는 <오사카 방적> 회사가 만들어졌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오사카의 해변에 길게 방적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섬유를 만들고 가공하는 방적 산업은 일본의 철도 산업, 금융 산업과 함께 일본의 근대화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산업중의 하나였다. 


1894년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벌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일전쟁이다. 일본은 근대화의 시험무대로 청일전쟁을 활용했고, 결과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많은 배상금을 통해 산업적인 재투자를 이룰 수 있었고, 그들이 방적 산업을 통해 만든 면 제품들을 조선과 중국에 대규모로 수출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수입보다 수출이 더 많아지면서 나라 경제가 흑자가 이루어지는 큰 기틀을 다지게 된다. 


이후 정확히 10년뒤, 일본은 다시 러일 전쟁을 일으킨다.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무도, 일본이 거대한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인해 더 많은 배상금을 챙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경제적으로 더 큰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면 제품을 영국과 유럽에 수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결국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더 많은 면 제품을 수출할 수 있었고, 1910년 한일합병까지 이루어내면서, 더 많은 인적 물전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

 1910년 이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함으로서 경제적으로 엄청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조선은 일본의 침략과 약탈로 인해 경제적으로 더욱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조선에서 굶어죽게 생긴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기 시작했다. 


일본에 가면, 낮은 임금이지만 일자리가 있었고, 차별과 핍박이 있었지만 그래도 조선보다는 더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죽는 것보다 일본에서 차별과 고통속에서 일하며 먹고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일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나라의 백성이, 그 모든 것을 빼앗은 나라에 가서 살아야 하는.... 


당시, 조선의 사정은 암울했다. 14세 정도 된 어린 여자아이들이 일본에서 온 모집인의 말을 믿고 오사카의 방적 공장으로 일을 하기 위해 떠나기 시작할 정도였다. 아이들은 부모와 헤어져 단신으로 혹은 동네의 여러 아이들과 함께 오사카로 떠났다. 물론 가족 단위의 이주도 있었다. 


1910년대 일본 오사카의 방적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조선의 여공들은 차별과 폭력, 저임금에 노출되었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라는 구조적인 문제인 동시에 민족적인 차별이었다. 


1913년 12월 26일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방적의 조선 여공]

오사카 지역 방적 회사에서는 조선 여자를 많이 쓰고 있다. 세츠 방적에 54명, 미에 방적에 40명, 그 외에 대여석 명이 있는 곳은 여기저기 보인다. 내지 여자들과 비교하면, 유순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남자에 미치는 일이 없는 것이 큰 장점이다. 올 6월 모집인을 경남 진주에 출장을 보내 데리고 왔다. 열네살 난 여자아이부터 스물 일곱까지 있다. 



1913년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기사엔 14세 부터의 조선 여자아이들이 갔다고 나오지만, 내가 만난 오사카 이즈미시의 할머니는 11세에 오사카의 방적 공장에서 일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노동법이라는 게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법적으로 제한이 있었고 노동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의 많은 방적 공장들은 그런 노동법을 피하기 위해 나이를 속이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1910년대부터 20년대 사이의 이주는 강제 징용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에게 대한 일본의 강제 징용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자됐다. 따라서 1910년대의 이주는 자발적인 이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제가 없었을까? 실은 강제보다도 더 끔찍할 수 있는 거짓 모집이었다. 월급으로 10엔을 준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 절반에 절반에 절반도 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10엔을 준다고 모집해 놓고, 실제로 일본에 가게 되면 중간에 조선인 남자 브로커들, 일본인 브로커들이 끼어든다. 브로커들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동할때 든 교통비 - 배와 철도 이용비와 식비 등을 월급에서 차감해 갔다. 또한 공장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의 식비, 기숙사비 등을 공제하고 월급을 지급했다. 또한 공장은 조선인 여공들을 조선인 남자들에게 관리하게 했고, 조선인 남자들은 엄청난 폭력을 휘두르며 여공들의 돈을 갈취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조직이 '상애회'다. 이후에 상애회에 대해서는 보다 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당시의 여공 모집은 강제 징용이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에 못지않은 속임수와 폭력이 있었다. 



다시 돌아와서, 1913년의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그 이전부터 조선의 여자들은 오사카의 방적공장 여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박경식, 박경옥이 1975에 쓴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과 국내 여러 논문들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1910년대에 일본에 간 조선인의 수는 2천명이 넘었다. 1920년대 중반에는 10만명, 1930년에는 40만명을 넘긴다. 그 중에 오사카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수치는 1920년에 700명, 1930년에는 2만명을 넘긴다.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조선인 여공들의 숫자를 살펴보면 아마도 훨씬 더 많은 조선인 여공들이 오사카에서 일했을 것이다.  


1914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더 큰 호항을 누리기 시작한다. 일본이 만든 군수품과 무기들, 그리고 방적공장에서 만든 면제품들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유럽으로 팔려 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일본에게는 축복의 전쟁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고 수출하면서 일본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다. 일본이 그런 호황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공장을 24시간 돌려야 했는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값 싼 노동력과 자원을 약탈했고, 그것은 일본의 산업적 발전의 일부 토대가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다.  191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오사카, 방적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조선인 여공들 중에 상당수는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들 일자리가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가족이 모두 일본에 와서 일한 경우에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가 여렵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일본에 남아 재일 조선인 1세대로 살아가게 된다. 


오사카에 터를 잡고 가족을 지키고, 대를 이어 이민자로 이방인으로 살아온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일본의 근대 산업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 공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차별과 핍박에 시달리며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1950년대 이후  재일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갖거나, 관공서나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일본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평생 살아온 동네의 시의원조차도 뽑을 수 없다. 정치 자체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1910년대부터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의 방적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공들 중에 일부는 재일 조선인 1세대 여성들이 되었다.  조선인 여공들은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누군가의 아내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가족을 지켜야 했다.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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