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vs 아빠, 책 읽어주기 승자는?
잠들기 전, 빛이는 자기가 들 수 있는 만큼 책을 잔뜩 쌓아서 들고 온다.
"아빠, 읽어줘어."
"지금 잘 시간이야. 다시 가서 오늘 읽고 싶은 거 딱 세 권만 가져와."
하루의 끝을 늘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은 빛이는 최대한 페이지 수가 많은 책 세 권을 들고 온다. 경험상 아빠가 오래 읽어줬던 책 위주로 고르는 것 같다.
"이것만 다 읽고 자는 거야, 알았지?"
나와는 이렇게 약속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빛이 자신과 약속된 대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또오!! 또 읽어줘."
아이들은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도 재미있나 보다. 문제는, 나에겐 재미가 없다는 거.
'이렇게 열심히 읽었는데 이걸 다시? 난 이미 주인공한테 감정을 다 쏟았는데?'
무너진 공든 탑을 다시 똑같이 쌓는 느낌이랄까. 물론 아이가 한 번에 쉽게 잠들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같은 책을 다시 읽으려니 도무지 흥이 안 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MSG.
"곰돌이가 갑~자기! '뽜아아아악!' 튀어나와가지고! '까암짝!' 놀란 토끼가 '으아아아아악!' 소리를 질러쒀여!!!"
내게 재미가 없으면 아이에게도 재미없을 거란 생각에 스스로 텐션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그렇게 또 한 편의 자극적인 동화가 마무리되면 빛이는 역시나 자동응답이다.
"또오오오오!"
여기서 '안 돼!'하고 끊으면 울고 짜증 내는 거 달래는 에너지가 더 많이 들 게 뻔하다. 세 권씩 세 바퀴 정도는 돌아야 나도 할 말이 있다.
MSG를 칠 기운이 다 떨어졌다. 이번엔 '건너뛰기' 기능을 사용한다. 빛이가 아직 글자를 모르니 굳이 다 읽지 않고 넘긴다. 이야기가 점점 짧아진다. 심지어 내용도 내 맘대로 바꾼다.
"곰돌이가 이제 졸리대. 하마가 내일 만나자고 하네? 토끼는 이미 꿈나라야. 빛이도 얼른 꿈나라 가서 곰돌이랑 하마랑 토끼랑 다 만나."
엄마가 빛이에게 책을 읽어준다.
'AI인가?'
빛이의 요구대로 엄마는 같은 책을 계속 똑같이 반복해서 읽는다. 목소리의 높낮이만 조절할 뿐이다. 내용이 조금도 틀어지지 않는다. 꾸준히 읽어주는 엄마도 신기하지만 매번 똑같이 흥미롭게 반응하는 빛이가 더 놀랍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이야기를 듣는 빛이 마음은 어떨지. 빛이를 따로 불러다가 조용히 물어봤다.
“빛이야, 엄마랑 아빠랑 누가 책 읽어주는 게 더 재밌어?”
별것 아닌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빛이가 대답을 못한다. 얼마간 머뭇거리더니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며 대답한다.
“그건 말 못 해.”
“아... 혹시 엄마가 읽어주는 게 더 재밌는데 '엄마'라고 대답하면 아빠가 서운할까 봐 대답 못하는 거야?”
“응.”
이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래도 저 마음이 참 감동이네.
새삼 또 느끼지만, 엄마와 아빠가 많이 달라서 다행이다. 아이들이 그만큼 다양한 세상을 경험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