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
"엄마, 이면지 있어?"
엄마의 업무가 끝나면, 다 쓴 A4용지는 빛이의 낙서장이 된다. 그래서 빛이는 엄마가 일할 때마다 늘 이면지를 기다린다.
그렇게 빛이는 이면지 몇 장을 얻어 자기 책상으로 향한다. 낙서장이 된 종이의 다음 행선지는 '벽' 또는 '바닥'이다. 끼적인 그림이 빛이 마음에 들면 벽으로 가 전시되고, 마음에 안 들면 바닥행이다.
청소기를 돌리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선택받지 못한 낙서'들을 따로 버리려고 빼 두었다. 빛이가 묻는다.
“아빠, 그건 왜 빼놔?”
“너무 커서 청소기에 안 들어가거든.”
빛이가 그 종이들을 들고 거실 한쪽에 자리를 잡는다.
“빛이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안 들어간다며.”
빛이는 친절하게도(?) 종이가 청소기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아주 잘게 잘게 찢고 있다. 소외된 쓰레기는 순간 놀잇감으로 변신하여 빛이의 촉감 놀이를 돕는다.
어느새 청소기를 손에 붙잡은 빛이는, 신나게 빨려 들어가는 종잇조각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종이는 그렇게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운다.
저 A4용지 한 장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불태우고 가는 삶이라면 후회가 없겠지? 아빠도 그렇게 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