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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기 Jan 04. 2024

그때 참 잘 보내셨어요

프롤로그

나의 첫 비전트립은 21살 때다.


불과 20년도 안된 시간인데,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대학생이 배낭을 메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일이 그리 흔치는 않았다.


특히나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성인남성의 경우,

도피가능성을 이유로 출입국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다.


여권을 만들거나 비자를 받는 일도 쉽지 않고,

받더라도 1회용 단수여권으로만 발급받는다.

출국하기 전 공항에서 따로 병무신고를 해야 하고,

돌아와서도 반드시 입국신고를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군 미필의 남성이 해외에 나가려면

넘어야할 산이 굉장히 높다는 인식이 있어서

굳이 해외로 나갈 엄두를 잘 안 내던 분위기다.


그리고 막연히 높다고 생각했던 그 산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


우선 준비해야 할 서류가 많았다.

지금이라면 온라인으로 쉽게 처리했을 문제들도

당시엔 관공서를 열심히 뛰어다녀야 했다.


가는 곳마다 길게 늘어선 줄로 대기시간도 길었고,

한번 신청한 서류는 몇 주가 걸릴지 몰랐다.

병무청 서류가 통과되어야 여권을 만들 수 있고,

여권이 나와야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데….

여행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바빴다.


가장 큰 문제는 ‘보증’이었다.


다른 건 어떻게든 혼자 차근차근 준비하겠는데

내가 해외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세 사람이나 보증을 세워야한다.


그것도 일정 재산 이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 세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증명하는 서류들을 받아 

제출해야 하는데 이걸 누구에게 부탁한단 말인가.


부모님 중 한 사람은 보증을 설 수 있었기 때문에 

우선 아버지 이름으로 한 자리를 채웠다.


지난해를 끝으로 양가 조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부탁으로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지내시는 

이모할머니께서 귀한 한자리를 또 채워주셨다.


하아. 쉬운 보증이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나 이런 보증은 참 불편하고 찜찜하다.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걱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누가 자신의 재산을 내게 다 까발리고 싶겠나.


목사님이라면 기꺼이 서주시겠다고 하겠지만,

대형교회를 제외한 대부분 목사님들이 그렇듯 

재산이 부족하여 탈락.


정말 감사하게도 마지막 남은 한 자리는,

우리교회 한 권사님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교회에서 자라나는 청년이라는 이유 하나로,

권사님은 전 재산을 걸고 보증을 서주셨다.


당시 21살 청년의 눈에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지만

지금 돌아서 생각해보면 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연변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50시간을 달려 도착한 작은 마을.


5살부터 15살까지 모여 있는 시골 학교에서

한국어, 영어, 음악 등을 가르치는 명목으로 갔지만,

순수함 가득 해맑은 아이들과 그저 신나게 놀았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아이들과 부대끼며 

함께 웃고, 떠들고, 끌어안던 기억들.


드넓은 대륙을 달리고 거대한 자연을 누리던 

3주간의 꿈같은 시간.


어쩌면 내 인생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다.




팀원 중 군대를 다녀오지 않는 남자는 내가 유일했다.

앞서 얘기했듯, 그만큼 쉽지 않은 길이었으니까.


그 어려움을 뚫고 가기로 결정한 선택이,

삶을 쪼개어 후원해주신 귀한 손길들이, 

권사님의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랑이,


지금 내 안의 이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냈다.

권사님께 꼭 다시 말씀드리고 싶다.


“그때 참 잘 보내셨어요. 그래서 이만큼 자랐습니다.” 




2023년,

올해의 추수감사절은 비전트립 보고예배로 드려졌다.


내가 첫 비전트립을 떠났던 나이인 21살의 청년 3명이

각각 ‘변화’, ‘시작’, ‘기회’라는 주제로 간증을 했다.


20년 후 이 청년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난 또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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