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는 시간은 없다
날씨가 많이 풀렸지만 아침엔 아직 좀 쌀쌀하다.
아직은 추워서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는 엄마의 논리와, 얇아도 괜찮다며 예쁜 옷을 입고 가겠다는 빛이의 우김이 붙었다. 팽팽한 접전이 이뤄졌지만, 결국 이를 악문 엄마의 발음이 뭉개지는 걸 보니 논리보다는 빛이의 고집이 우세해 보인다. 싸움이 더 길어지면 지각할 것 같아 빛이를 데리고 얼른 나왔다. 결과적으론 '우김' 승.
"나 씽씽이 타고 갈래."
"그럼 난 자전거 탈래."
밖으로 나오자마자 빛이가 씽씽이를 잡는다. 덩달아 하늘이까지 자전거에 올라탄다.
'하아, 그냥 걸어가지?!'
등교시간엔 단지 내로 들어오는 유치원 버스가 많아 위험하기도 하고, 가는 중간에 큰 횡단보도도 하나 건너야 한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씽씽이와 자전거를 따라다닐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다. 하지만 난 싸우지 않는다. 사실 싸울 시간이 없다. "장갑도 안 끼고 나왔는데 손 시리지 않겠어?"라는 무의미한 말과 함께 그저 열심히 뛴다.
"너 1학년이지?"
학교에 도착할 때쯤, 교문 앞 작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옆에 지나가던 웬 아저씨가 빛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초등학생이 되면 씽씽이 타고 다니는 거 아니야. 여기 씽씽이 타고 오는 사람 아무도 없지?"
내가 말했으면 분명 "왜?"라고 대답했을 아이가 멋쩍은 듯 '씨익' 웃으며 "네."라고 순순히 대답한다. 잠시 후 신호가 바뀌고 교문 안으로 들어서는 빛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난 남겨진 씽씽이를 타고 돌아온다.
'근데 저 아저씨 누구였더라? 나 대신 얘기해줘서 고맙긴 한데, 왜 남의 딸한테 씽씽이를 타라 마라지? 어디서 분명 본 얼굴인데...'
기억났다! 입학식 때 봤던 교장선생님!
하굣길에 빛이에게 묻는다.
"빛이야, 아까 아침에 빛이한테 씽씽이 타지 말라고 했던 분 누군지 알아?"
"그 아저씨? 몰라."
"너네 학교 교장선생님이야!"
"......"
터질 듯이 커진 눈과 떡 벌어진 입이 빛이의 말을 대신한다. 이제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도 교장선생님의 존재가 뭔가 크게 느껴지긴 했나 보다.
그날 이후로 빛이는 별 얘기 안 해도 등교할 때 항상 걸어 다닌다.
'그 아침, 내가 씽씽이를 못 타게 말리느라 시간을 끌었으면 교장선생님과 마주치지 못했겠지? 그리고 지금도 씽씽이를 두고 아침마다 씨름을 하고 있겠지.'
내가 아이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씽씽이를 따라간 것도, 아내가 따뜻한 옷을 입히려 논리를 펼친 시간도, 결국 가장 좋은 타이밍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나 보다.
지나보면, 다 의미 있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