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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의 발전

그림 대회

by 윤슬기

어버이날 하굣길,


초등학교 1학년 첫째 딸은 가방에서 자신이 만든 선물을 하나씩 꺼내며 자랑하기 바빴다. 여섯 개의 꽃잎에 메시지가 숨겨진 특별한 꽃과, 볼펜, 쿠폰 등을 꺼내며 정신없이 설명한다.


정성스레 만든 아이의 선물보다 더 잊히지 않는 건, 선물을 줄 때의 그 신나고 해맑은 표정이다.


한바탕 '선물쇼'와 격한 고마움'리액션쇼'가 끝나자 빛이가 못 보던 수첩 하나를 꺼낸다.


"아빠, 나 학교에서 그림 대회 있었는데 선물로 수첩이랑 볼펜 받았어."

"뭘 그렸는데? 그림 그려서 내면 수첩이랑 볼펜 주는 거야?"


"자기 가족을 그리는 건데 1학년에서 한 명, 2학년에서 한 명, 그런 식으로 줬거든? 근데 빛이가 뽑힌 거야."

"아, 진짜? 반에서 한 명씩 주는 게 아니라 1반부터 6반까지 다 합쳐서 한 명만 뽑았다고?"


"응. 아침에 학교 TV에서 방송 나왔는데, 1학년은 빛이꺼 그림이 나와서 선생님이 친구들한테 박수 쳐주라고 했어."

"그럼 엄청 대단한 거 아냐? 근데 무슨 그런 얘기를 이렇게 무덤덤하게 해?"


그제야 빛이는 '씨익' 웃으며 다시 신났다.


"대단한 거야? 그럼 이따 엄마한테도 얘기해 줘."


엄마아빠 선물 줄 때는 그렇게 신나 하더니. '자발적 신남' 후에 뒤따라오는 '한발 늦은 깨달음의 신남'이랄까.




이틀 후,


근처 공원에서 열린 '어린이 축제'에 참여했다. 해마다 지자체에서 개최하는 대규모 행사다. 여기저기 수십 개의 부스가 늘어섰고, 각 나라별 문화 체험, 만들기, 마술쇼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세 아이들 모두 신이 났다. 전문가 선생님들로부터 캐리커쳐도 선물로 받고, 소울 넘치는 케냐 아저씨와 노래에 맞춰 신나는 젬베 연주도 하고, 간식 만들기 코너에서 샌드위치와 쿠키를 만들어 배고픔도 달랬다.


그러나,


이 축제의 진정한 꽃은 '어린이 그림 대회'다. 행사가 시작될 때 도화지를 받고 주최 측에서 주제를 알려주면, 일정이 끝나는 오후 3시까지 그림을 그려 제출하는 방식이다.


다섯 가지 주제 중 선택할 수 있었는데, 8살 빛이는 '내가 만드는 특별한 학교', 5살 하늘인 '우리 가족의 작은 기적'이란 주제를 '스스로' 골랐다.


그늘막 아래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이미 실컷 느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그림을 차분히 그리기 시작한다. 난 공원 밖으로 나가 여기저기 들러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료와 김밥, 짜장면, 탕수육 등을 포장해 왔다.


사이 아이들은 하얀 도화지를 거의 다 채웠다. 먼저 작품을 완성한 하늘이가 말한다.


"아빠는 요리하는 거고, 엄마는 컴퓨터로 일하는 거야. 언니는 공부해서 글자를 쓰고, 하늘이도 언니 따라서 글자를 배우는 거야. 그리고 별이는 이제 일어서서 두 발자국 걸어."


제목: 걷기 시작한 동생 (하늘이 그림 일부)


쉽게 알아보기 힘든 5살의 그림이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꽤나 그럴듯하다. '우리 가족의 작은 기적'이란 주제와도 잘 맞는 것 같다.


빛이는 '학교'에 관한 주제를 택한다더니, 가운데 웬 커다란 지구를 하나 그려 놨다.


"전 세계에 있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나라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거야."


제목: 전 세계 학교 여행 (빛이 그림 일부)


"엄청 창의적인데?!"


절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그림을 보니 욕심이 생긴다. 아예 가능성이 없으면 모르겠는데 고슴도치 아빠 눈엔 아이디어가 참 신선하다. 엊그제 그림 대회에서 상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서 더 그런 지도.


"여기가 비어 있잖아. 뭐라도 더 그려서 채워 봐. 이쪽엔 구름이라도 하나 들어가면 더 좋지 않을까?"


'조금만', '또 조금만', '또 아주아주 조금만' 손대고 싶은 마음이 계속 스멀스멀 피어올랐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간이 다 됐다. 정신이 번쩍 든다.


'이래서 부모들이 자꾸 자식에게 욕심을 내는구나.'


처음엔 아이들이 축제에 참여해 보는 경험이면 됐는데. 그리는 동안 즐거우면 됐는데.


'이왕 그린 거 우리 아이가 상을 받고 기뻐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의 발전이 무섭다. 난 빨리 손을 떼어야겠다. 이런 건 아이들 엄마에게 맡기기로 마음먹고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하늘이에게 정신없이 말하고 있다.


"하늘아, 아빠 옷은 왜 안 칠했어? 여기도 칠해줘야지."




아, 엄마도 안 되겠다.




돌아오는 길, 뒷좌석에서 빛이가 계속 중얼댄다.


"나 이거 상 받았으면 좋겠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고. 빛이도 안 받아봤을 땐 몰랐는데, 이미 상 맛을 본 것 같다.


"빛이야, 이건 학교에서 하는 거랑 달라서 엄청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라 상 받기 힘들 수도 있어."

"그래도 받았으면 좋겠어."


"상 받는 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냐. 우리가 오늘 재밌게 놀고 좋은 시간 보냈잖아."

"그래도 상 받았으면 좋겠어."


"결과는 한 달 뒤에 발표한대."

"어, 그러니까. 상 받았으면 좋겠다고."


상을 받지 못했을 때 아이가 받을 실망감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아이가 실망할 모습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한 걸까.


'그냥 받고 싶은 마음에만 공감해 줄걸.'


왜 그렇게 못 받을 것에 대한 '밑밥'을 깔았는지 모르겠다. 상을 받지 못해 아쉬움을 느껴보는 것도 본인의 몫이고, 성장하는 과정일 텐데 말이다.


"빛이야, 근데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


이제야 관심을 보이는 빛이에게 마음의 말을 쏟아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좋은데, 그 내용을 잘 설명해 주는 게 훨씬 더 중요해.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많지만, 그림에 담긴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




기술이 발전할수록, 기능이 발달할수록, 자신만의 이야기가 풍성한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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