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 대로 거둔다
"너가 그림을 그리면 언니가 옆에다 편지를 써 줄게."
5살 하늘이가 스승의 날 선물을 만들겠다며 종이에 유치원 선생님을 그리자, 하늘이가 하고 싶은 말은 자랑스런 초등학교 1학년 언니가 대신 적어 준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엄마가 첫째에게 묻는다.
"빛이야, 너도 선생님 선물 만들 거야?"
"난 K선생님 선물 만들려고."
K선생님은 작년 유치원 때 담임선생님이다. 유치원 때는 어린이집 선생님한테 선물을 드리고, 초등학교 때는 유치원 선생님한테 선물을 드리는 거란다.
그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거니.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힐 것 같은데, 현실에 충실한 8살 아이가 작년 선생님을 먼저 생각하는 게 놀랍다. 그런데 막상 그 선생님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
유치원에서 플라스틱 뚜껑을 재활용하는 업체에 견학을 다녀왔다. 선생님은 그 흐름을 이어 '우리가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아이들과 토의했다.
그날 이후 빛이는, 스스로 '지구 지킴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전기와 물 등을 아껴 쓰는 데 앞장섰다. 분리수거와 재활용에 대한 개념도 생겼다.
집에서 다 쓴 플라스틱 뚜껑을 가져오면, 선생님은 '꿈'이라는 단위의 동그란 종이 화폐 한 장과 바꿔주셨다. 1꿈 짜리가 모이면 5꿈, 10꿈 짜리 화폐로도 바꿀 수 있었다. 당시 빛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넌 꿈 몇 개 있어?"
"난 세 개."
"난 꿈이 하나도 없어."
"내가 꿈 나눠줄까?"
선생님은 '꿈' 화폐를 나눠주시며 자연스레 아이들과 꿈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눴다.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떠올리며 장래희망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개인의 꿈'과, 지구를 지키는 '우리의 꿈'이 함께 피어났다.
'1꿈, 2꿈, 3꿈...'
집에서 페트병이 생기는 족족 빛이는 플라스틱 뚜껑 모으기에 바빴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떨어진 플라스틱 뚜껑을 보고 신나게 달려가는 빛이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빛이야, 다른 사람이 먹던 플라스틱 뚜껑은 만지면 병이 옮을 수 있어. 그냥 그대로 둬."
"근데 저 뚜껑을 보면, 바닥에 꿈이 떨어져 있는 거 같애."
어찌 줍지 않으랴.
빛이네 반 아이들은 자신이 쓰지 않는 장난감을 기증했다. 그리고 장난감을 낼 때 자신이 직접 가격을 매겼다.
빛이는 20꿈 짜리 '핑크퐁 지갑'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당시 4살 동생 하늘이를 위한 30꿈 짜리 '뽀로로 버스' 또한 위시리스트에 올렸다.
"빛이야, 이제 20꿈 모았으니까 핑크퐁 살 거야?"
"아니. 더 모아서 50꿈 되면 하늘이 뽀로로 버스랑 같이 살 거야."
딸이 원하는 물건을 다 얻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꿈'을 모으는 사이 원하는 물건이 없어지는 경험을 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왠지 더 컸다.
30꿈을 모은 빛이는 하늘이의 뽀로로 버스를 먼저 사 왔다. 동생이 그렇게 말을 안 들어도, 동생부터 챙기는 어쩔 수 없는 첫째다.
"아빠! 친구가 핑크퐁을 사 가버렸어. 쪼끔만 더 모으면 되는데."
"그 친구도 갖고 싶었었나 보지 뭐. 대신 빛이가 뽀로로 버스를 먼저 사 와서 하늘이가 저렇게 좋아하잖아."
빛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투덜댔지만 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한 번의 견학으로 절약, 재활용, 환경, 경제관념, 수학, 기회비용, 나눔 등의 무궁무진한 교육을 만들어내는 선생님 덕분에 '대한민국 유치원 교육 수준'이 자랑스러워진다.
며칠 전,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빛이의 하교를 기다리던 중, 바로 옆 유치원에서 퇴근하시던 K선생님과 마주쳤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지금 빛이 나오는 거 기다리는 중이에요."
"아, 그래요? 그럼 저도 빛이 보고 갈게요."
그러나, 그날따라 빛이가 제시간보다 많이 늦는다. 퇴근하시던 선생님을 붙들고 있기가 미안해서 먼저 들어가시라 했다. 선생님은 빛이에게 안부 꼭 전해달라시며 발걸음을 떼셨다.
"아빠, 나오는 길에 화장실 다녀오느라 좀 늦었어."
잠시 후, 빛이가 나타났다.
"빛이야, 쩌어기 멀리 회색옷 입고 걸어가시는 분 누군지 알아? K선생님이야. 원래 아까..."
빛이가 없다. 이미 미친 듯이 달리는 중이다. 다행히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따라잡았고, 달려오는 빛이를 본 선생님도 달려와 빛이를 꼭 끌어안으셨다.
'어쩜 저렇게 반사적으로 해맑게 달려갈까.'
매일 아이들 한 명, 한 명 따뜻하게 안아주시던 선생님의 진심 때문일 거다. 정성스레 준비된 품격 있는 교육도, 그 사랑이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확신한다.
올해 하늘이가 유치원 입학할 때 빛이가 해줬던 말이 기억난다.
"하늘아, 유치원 가면 K선생님 있는데 진짜 좋아. K선생님은 화가 없어."
선생님이라고 왜 화가 없었을까. 그럼에도 '화'가 아닌, '사랑'만 남겨주신 K선생님을 만난 건 빛이의 삶에 굉장한 축복이다.
유치원 졸업식 때, 참다못해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 못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늘아, 빨리 일어나, 유치원 가야지!"
어제 늦게 잠든 하늘이가 늑장을 부린다.
"오늘 유치원에서 상추 심는다며. 늦으면 하늘이만 못 심을 수도 있겠는데?"
하늘이가 번쩍 일어나 '후다닥' 준비한다. 매일 상추 좀 심었으면 좋겠다. 준비를 마친 하늘이가 신나서 말한다.
"아빠, 언니가 그러는데 상추 심어서 익으면 따 먹을 수도 있대. 하늘이가 바구니 가져가서 가져오께!"
"아아, 상추가 익어? 그리고 오늘 심는데 오늘 따려고?"
아무리 뿌린 대로 거둔다지만, 거두려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법. 사람에 대해서는 특히나 더 그렇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참 특별한 선생님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