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더 좋을까?
첫째 빛이가 처음 유치원에 다닐 때, 5분 정도 늦게 데리러 간 적이 있다. 늘 하원시간 10분 전엔 미리 가서 기다리는데 세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베 갈래애애애애!"
유치원 현관 유리문 안쪽으로 드러누운 딸의 비명이 들린다. 유치원 가는 것도 좋아하고, 유치원 생활도 재밌어했는데 너무 의외의 모습이다. 항상 1등으로 와서 기다리는 아빠가 없는 걸 보는 일종의 '배신감'이었을까.
얼른 들어가 서럽게 우는 딸을 데리고 나왔다. 다시는 늦지 않기로 다짐하며 뼈에 새겼다.
그새 뼈가 녹았나.
또 늦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친 듯이 전력질주를 했다. 도착하자마자 드러누운 아이부터 찾았다.
'어라? 잠잠하네?'
유치원 현관은 조용했고, 빛이는 옆에 있는 다른 친구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심지어 이번엔 많이 늦어서 다들 가고, 빛이와 그 친구 둘만 남아있던 상황이다.
"아빠, 왜 이렇게 늦었어?"
"빛이가 일찍 가버렸으면 친구가 혼자 남아서 심심하게 기다렸을 거잖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어떤 핀잔도 받아낼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빛이는 의외로 차분했다.
"아아, 그래? 그럼 좀 더 기다리자."
두 번만에 익숙해진 건가. 아빠는 늦게라도 온다는 사실을 지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 같다. 잠시 후, 헐레벌떡 뛰어오는 친구의 엄마를 보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왜케 아빠만 맨날 빨리와아아!"
둘째는 다르다. 올해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 하늘이는 아빠가 빨리 오는 게 불만이다. 첫째 때의 경험이 있어 절대 안 늦으려 한 건데 뒤통수 맞은 기분.
"하늘아, 아빠가 빨리 오는 게 싫어?"
"다른 친구들은 1반으로 가는데 하늘이만 내려와야 되잖아."
막상 하늘이 얘기를 차근차근 들어 보니,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르긴 했다. 오전엔 반이 세 개였다가 점심시간 이후 두 반이 되고, 하늘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원하는 오후 4시가 되면, 남은 친구들은 모두 1반으로 모인다고 한다. 하늘인 오전에도 2반, 오후에도 2반에 배정되어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같은 교실에만 있는 게 불만인 거였다.
"나도 1반 가보고 시퍼어!"
1반이라고 특별히 다를 게 있겠냐마는, 궁금한 건 못 참는 하늘이에게 '1반'은 미지의 세계였다. 4시가 되어 1반으로 가는 몇몇 친구들이 부러웠던 하늘인 결국 며칠간 나를 조른 끝에 4시 30분에 하원하기로 했다.
아싸.
"하늘아, 요즘도 유치원에서 소미랑 잘 놀아?"
"아니, 이제 소미랑은 더 놀 게 없어."
"새로운 놀이를 해보면 안 돼?"
"선생님이 새로운 놀잇감을 안 줘!"
"선생님한테 달라고 얘기는 해봤어?"
"아니, 그건 부끄러워서 말 못 하겠어."
"그럼 어떡해?"
"다른 친구들이랑 놀지. 소미도 새로운 친구들이랑 놀아."
학기 초에 담임 선생님이 너무 둘이서만 놀게 될까 살짝 걱정하셨는데, 아이들은 자연스레 새로움을 찾아 스스로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 같다.
아이들도 나도, 익숙해지며 성장하는 만족과,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찾는 기쁨을 잘 누리며 살았으면.
하원시간을 미룬 후로 한동안 만족스럽게 다니던 하늘이가 말한다.
"아빠, 나 좀 더 늦게 데리러 오면 안 돼?"
이건 유치원의 익숙함을 더 누리려는 건가,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시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