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든 생각
얼마 전 천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서도 개봉했다. 상영관과 상영 횟수가 좀처럼 업데이트되지 않아, '과연 여기서 볼 수 있을까'라고 조마조마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 대한 입소문은 캐나다에서도 통했던 모양이었는지, 다행히 이번 주 주말을 기점으로 상영 횟수가 확 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곳 시간으로 금요일 저녁이었던 어제, 마침내 <왕과 사는 남자>를 감상할 수 있었다. 모처럼 영화관으로 입장하는 길에 익숙한 한국어를 여럿 들을 수 있었다. 영화를 감상하는 두 시간 내내 한국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외국인을 위해 영어 자막도 함께 제공되어 캐나다인인 남편과 함께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왕과 사는 남자>의 성공의 일등 공신은 뭐니 뭐니 해도 캐스팅이 아닐까. 출중한 캐스팅 명단 중에서도 조금은 낯선 이름.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박지훈이라는 사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배우는 눈빛을 파는 직업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박지훈이라는 배우는 그 직업으로서의 소명을 훌륭하게 완수해 냈다는 느낌이다.
사실 영화의 초반부는 조금 산만하기도 할 정도였다. 빈틈없이 꼼꼼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흐름이 뚝뚝 끊기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다행히 중반부 이후로 단종의 심경이 달라짐과 함께 급격하게 변화하는 영화의 스토리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었지만.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는 미묘한 감정마저 들었다. 후반부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손수건을 준비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미 이 영화가 곧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찍을 것이라는 뉴스를 접했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게 천만 영화가 될 거라고?" 하는 의아함마저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짜임새라던지 핍진성이라던지 그런 것은 차치하고, 적어도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으로 하여금 무언가 울림을 느끼게 했다면 그 자체로서 관객을 설득한다는 목적은 이미 달성한 것이 아닐까. 나 역시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은 않은 이 영화에 일종의 '설득'을 당했다. 올겨울에 한국에 간다면 꼭 한 번쯤 강원도 영월을 방문해, 단종이 머물렀던 청령포와 그 일대를 직접 걸어보고 싶어지게끔 만드는 영화다.
작가 유시민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세조의 계유정난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과연 그 수단은 옳지 않아도 되는가?" <왕과 사는 남자>의 감독 장항준은 또 이렇게 말했다. "실패의 동의어가 나약함은 아니잖아요." 아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단종의 대사 중에도 이런 말이 있다. "더 이상 역사의 방관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후대의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를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들은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는 것을 믿어줄 것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그 특성상 실수, 그리고 실패에 관대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각자 나름의 생채기를 감싸 가며 그런 사회에 어찌어찌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점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산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말이다. 물론 나처럼 힘에 부쳐 일종의 도망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고.
나 역시 여유로운 캐나다에서 지내다가, 일 년에 한 번쯤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어렵지 않게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남편은 종종 한국에서의 내 모습은 자신이 알고 있던 Sam이 아닌 것 같다고 농담조로 말하곤 한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려 하고,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계획한 대로 흘러갈 수 없는 게 마련인 것이 아닌가? 때로는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하고,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어떨 때는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또 어디선가 이득을 보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백 퍼센트 완벽하지 않은 짜임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관객 모두를 100퍼센트 만족시킬 만한 영화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만 명이라는, 결코 쉽지만은 않은 숫자의 관객들을 스크린 앞으로 모으게 된 구심점은 바로 그런 것에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그런 계산적이고 관대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소시민적인 항의랄까 대항이랄까. 나름 숨통을 트일 만한 구석을 찾고 싶었던 모두의 소소한 바람이 묻어난 것이, 어쩌면 바로 이 영화의 흥행의 비결 중 하나는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