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넛 버터의 뒷 이야기
거의 10년 전쯤 잠깐 로마에 갔을 때 한인 민박에 묵었었다. 한식을 그리워할 타이밍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한국말로 조금 떠들고 싶었다. 한인 민박은 오래된 주택 3층인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출입문을 따기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밥은 기대했던 만큼 잘 나왔고, 같은 방을 쓰는 언니들과 친해져서 같이 여행까지 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엄청난 의지력과 씩씩함을 탑재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묘한 외로움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민박집에서 묵은 며칠 동안 아침밥을 씩씩하게 먹고 덥디더운 로마를 거닐며 아주 오래전에 사람들이 거닐고 숨 쉬었을 유적들을 보고, 점심은 젤라토로 배를 채우며 걷고 또 걸어 다녔다.
그렇게 외로움을 감추며 여행을 즐기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안 열리는 민박집 문을 열쇠로 낑낑 거리며 열고 있었는데, 누군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봤는데, 그 사람은 나를 스쳐지나 옆집 문을 빠르게 열고 들어갔다. 그가 바로 <피넛버터>에도 나오는 위아래로 하얀 옷을 입고 백의민족의 티를 냈던 어떤 한국인 청년이다. 그와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했지만, 잠깐 스쳐 지나가기만 했을 뿐이지만, 뒷모습만 봤을 뿐이지만, 로마이기도 하고, 장소가 또 오래된 이탈리아 로마의 주택인지라 내 마음엔 순간적으로 몽글몽글함이 파바박 튀었다. 거의 10년 전의 이야긴데도 그 순간은 머릿속에서 바로바로 튀어나온다. 사실 그의 얼굴도 모르기 때문에 그 찰나의 장면을 가끔 머릿속 32번 칸 정도에서 돌려 보면서 내 맘대로 상상하면서 지냈다. 로마를 생각할 때면 남몰래 그를 그리워하며.
땅콩버터라도 빌리러 문을 두드려 볼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