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자취를 처음 시작했다. 자취방에 짐을 넣으며 엄마한테 뭘 사달라고 했다가 까였다. 의자였던가. 하도 오래되어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엄마와 나눈 대화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 왜~ 사주라. 없으면 불편하잖아.
- 불편해야지 그럼. 호화롭게 살려고 했어?
대학시절 엄마와 했던 모든 대화는 저런 식이었다. 엄마는 내가 혹여나 타지에서 편하게 잘 지낼까 봐 걱정인 사람처럼 보였다. 본가에 내려갔을 때 장 보러 따라가서 브래지어가 필요하다고 한 마디 했다가 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속옷 하나도 엄마 돈으로 사려고 안달이라며.
엄마와 나 사이 쌓인 많은 앙금 중 60% 정도를 차지한 것은 바로 돈 문제다. 우리 집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엄마의 다소 비이성적인 경제관념에 대해 설명하려면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오래 병석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가세가 기운 집과 남아선호 사상으로 똘똘 뭉쳤던 외할머니, 그런 환경에서 자란 딸인 우리 엄마에 대해서. 너무 흔해서 그 무게가 퇴색되기 쉬운 비극이다. 그것이 대를 걸쳐 내려와 mz라 불리는 세대인 나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평생 엄마가 할머니에게 받은 상처에 대해 들으며 자라왔다. 불쌍한 우리 엄마.
그래서일까. 나도 엄마에게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엄마는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엄마가 생각했을 때 외할머니에 비하면 엄마는 내게 너무나 많은 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있었으므로. 엄마는 내게 뭔가를 하나 해줄 때마다 당신도 외할머니에게 응당 받았어야 했지만 받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한스러워했다. 학생 때 패딩 한 벌을 사주면서도 "나는 너희 외할머니한테 이런 건 꿈도 꾸지 못했다" 하는 식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상처를 남겼다. 모녀의 애증은 외할머니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나로 대를 이어 내려왔다.
사실만 놓고 보자면 엄마가 내게 뭔가 크게 해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독히 불평하면서도 내 성장과 자립에 필요한 돈은 다 지원해 주었다. 4년 내내 내주네 마네 하며 나를 미치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학 학비를 끝까지 내주었고, 자취방 보증금도 해주었다. 최근에는 그 보증금 일부를 결혼 자금으로 쓰라고 떼어주기도 했다. 불평하면서도 결국 다 해주었다. 다 해줄 거면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굴었고 본인도 그렇게 고통받았다. 그런 엄마가 가여우면서도 원망스러웠다.
돈에 대해 많이 너그러워진 요즘도 엄마의 입버릇은 '이번달에 돈 너무 많이 썼어'다. 친구를 만나 먹은 밥값이며 경조사로 나간 돈, 길거리에서 산 2만 원짜리 셔츠 한 장까지. 들어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소비들인데도 줄줄 읊으며 늘 돈을 많이 썼음을 한탄한다. 엄마에게 소비는 죄악이어서 돈을 쓰는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다이어트 강박이 있는 친구가 만날 때마다 이번주에 너무 많이 먹었다고 자책하는 모습과 꼭 닮았다. 강박증 환자처럼, 본인의 죄를 두려워하며 참회하는 신자처럼, 엄마는 그 달에 지출한 항목들을 습관적으로 달달 외며 산다. 식당에 가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제일 싼 메뉴만을 고르는 엄마가 평생 짠하고 답답했다. 그런 엄마에게 내 대학 진학은 큰 고비였을 것이다.
엄마는 원래부터 구두쇠였지만 돈 때문에 엄마와 나 사이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것은 대학 시절부터였다. 엄마의 성향을 너무도 잘 알아 자라면서 비싼 것을 바란 적이 없었던 나다. 일부러 참은 것은 아니고 엄마의 성향을 물려받았는지 어쨌는지 애초에 갖고 싶은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십 대 때까진 크게 돈 들어갈 일이 없었다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학기마다 수백 씩 등록금이 나가게 되자 엄마는 당혹스러워했다. 등록금이 얼마 들 거라고 예상하는 것과 실제로 통장에서 등록금이 빠져나가는 것은 천지차이였을 것이다. 엄마는 괴로워했고 성인이 된 자식에게 돈이 이만큼 나간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못 간 당신과 달리 자식은 대학에 꼭 가기를 바랐으면서도.
그쯤부터였다. 한 주의 소비를 계산해 보는 바로 그 습관처럼, 엄마는 나만 보면 내가 초중고 때부터 대학에 가는 동안 들었던 모든 비용을 계산해서 읊기 시작했다. 저녁에 치킨 먹자 말이라도 꺼내면 내가 고등학생 때 입었던 패딩 가격을 알 수 있었고, 올 때 아이스크림~ 하면 작년에 바꾼 스마트폰 가격이 돌아왔다. 내 모든 말과 행동마다 엄마는 내게 들어간 돈을 떠올리며 괴로워했고 괴롭혔다.
언제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가 끝나고 스탭 롤이 올라갈 때 엄마가 내게 시간을 물었다. 핸드폰을 두고 다니는 것은 엄마의 나쁜 습관으로 언제나 가족들의 빈축을 사 왔다. 그날도 나는 짐짓 짜증을 내며 "아, 폰 좀 가지고 다니라니까" 했다. 그 한 마디에 별안간 엄마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더니 영화관이 떠나가라 고함을 내질렀다.
그 핸드폰 내 돈으로 사준 거잖아! 내 돈으로 산 거라고!
그즈음에 엄마는 진심으로 나를 증오하는 것 같았다. 내 모든 행동에 마치 본인 돈 빌려간 사람의 SNS라도 보는 것처럼 반응했다. 맥락과 상관없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돈과 연관시켰다. 친구와 어딜 놀러 갔다고 하면 내가 대단히 분에 넘치는 호강을 하고 다니는 것처럼 말했고, 조금이라도 짜증을 내면 당신이 해준 것들을 떠올리며 필요 이상으로 노여워했다. 걸핏하면 등록금을 내주지 않겠다 했고, 자취방 보증금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전처럼 살갑게 굴지 않으면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성정이 차갑다며 본인을 외로운 사람이라 칭했다.
때때로 내가 당신의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까 두려워하며 부모의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 일장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나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게 자랐다. 결혼해도 한 푼도 지원해 줄 수 없다는 말을 무려 초등학생 때부터 들었던 내가 감히 무엇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내 대학생활은 언제 휴학해야 할지 모르는 살얼음 판이었고 무엇보다 외로운 나날이었다. 미래가 두려웠고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엄마가 당장 보증금을 빼라고 하면 고시원이라도 가야 하는데 생활비에 월세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당장 다음 학기부터 등록금 지원을 끊는다면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어 졸업하기까지 몇 년이 걸릴까? 그러고 나면 나이가 꽤 될 텐데 취업은 할 수 있을까? 설령 엄마의 자비로 4년 안에 무사히 졸업하더라도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지 못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게 부러운 게 아니라 부모가 기다려준다는 것이, 더 지원해주려고 하고, 지원은 못해주더라도 선택을 응원해 준다는 것이 부러웠다. 나에겐 어려울 때 엄마에게 도움이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없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등록금과 보증금 외에 필요한 돈은 최대한 알바를 해서 충당했다. 4년 내내 알바를 쉬어본 적이 없었고 방학 때는 주 7일을 일하기도 했다. 그게 힘들다기보단 부모님께 최대한 손 벌리지 않는 게 뿌듯했다. 다만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엄마에게 그런 이야길 꺼내면 돌아오는 것은 초중고 때 다녔던 학원비 금액이었다. 엄마가 평생 사줬던 옷들, 보내줬던 학원들, 새로 사줬던 핸드폰까지.... 대화의 출발점이 달랐다. 아무리 생활비를 벌어 쓴다 해도 십 대 때부터 두드리는 계산기 앞에서는 먹히질 않았다. 태어나 먹고 자란 것만으로 빚이 쌓여 있었으므로 아무리 애써도 엄마에게 인정받을 수 없었다. 제 용돈 벌어 쓰는 것 정도로는 기특한 자식이 될 수 없었다. 엄마의 비교대상은 누구네 아들 딸이 아닌 엄마와 오빠를 벌어 먹였던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나이에 딸이라는 이유로 집안을 건사해야 했던 엄마가 안쓰럽다. 그렇지만 나는 사실 그런 엄마가 부러운 적도 있었다. 적어도 외할머니는 진짜로 돈이 없었다. 돈이 있는데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 소득이 높아서 국가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 대상에도 들지 못했다. 엄마는 형편이 안 돼서 대학을 못 간 거였는데 나는 형편이 되는데도 마음 졸이며 죄인처럼 다녀야 했다. 엄마와 돈으로 말다툼을 한 날이면 차라리 집에 진짜 돈이 없었으면 했다. 그러면 엄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근거를 들 때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저 사람도 자기 집에서 귀한 자식이니 밖에서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럼 나는 의문이 든다. 집에서 귀한 자식이 아니면 밖에서도 함부로 대해져도 되는 걸까. 외동이 많지 않던 시절에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나는 도무지 집에서 귀한 사람은 아니었다. 없는 형편에 뭐라도 해주고 싶은 자식이 아니라, 넉넉한 형편에도 뭘 해주기 아까운 자식이었다. 브래지어 하나 필요하다고 했다가도 독하다는 말을 듣는 딸이었다.
엄마가 안쓰러운 적은 많았다. 엄마의 입장을 헤아리려 평생 부단히 노력했다. 엄마와 소통하고 화해하고 싶은 욕구는 지금도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에도 울며 싸우기만 할 뿐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나의 고통을 말한들 엄마로 하여금 당신이 내게 해준 수백 가지 항목을 다시 셈해보게 만들 뿐이다. 엄마는 오히려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엄마의 고통을 딸인 내가 헤아리고 어루만져주기를 바란다. 서로 자기 아픔만을 말하니 대화가 될 리 없다.
나는 이제 엄마에게 서운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서럽고 억울한 것이 생겨도 남편에게만 털어놓고 만다. 당사자에게 말하는 것만은 못해서 가끔 엄마와 말다툼을 하는 꿈을 꾼다. 돈 문제와 관련해서 엄마와 풀지 못한 응어리는 매일밤 악몽으로 써먹어도 향후 몇 년은 소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많다. 어릴 때 맞벌이 하는 부모님의 퇴근이 늦어져 무서운 마음에 집안 불을 다 켜고 있었다가 전기세 나간다며 혼났던 것, 엄마 핸드폰을 잘못 만졌다가 실수로 몇백 원이 결제된 것으로 뒤지게 맞았던 것, 갚겠다고 사정을 해봐도 여행비를 빌려주지 않아 친구들과의 해외여행에서 나만 빠졌던 것, 등록금을 못 낼 뻔했던 것, 급전이 필요해서 엄마한테 연이율 3%로 돈을 빌린 것에 감동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외삼촌에게는 무이자로 몇 번이나 빌려줬던 것, 분명 이삿날 보증금 받아서 갚기로 했는데 일찍부터 독촉했던 것, 한밤중에도 그 연락을 했던 것, 내가 설마 떼먹을 리도 없는데 한창 이사 중에도 그 새를 못 참고 돈 보내라고 카톡 한 것....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말들을 삼키고 엄마와 화해하는 것을 단념하고 나자 엄마와의 관계는 오히려 많이 좋아졌다. 그냥 쭉 이렇게 지내는 게 정답인 걸까?
재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쇠약해지신 뒤에도 한 번도 동요한 적 없던 엄마가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영정사진을 챙기러 가서도 울고 발인을 하며 또 울었다. 좋은 것만 기억할 테니 엄마도 그러라며 차갑게 굳은 할머니의 뺨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결국 외할머니와 엄마는 이번 생에 화해하지 못했다. 엄마가 간직하겠다고 한 '좋은 기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엄마와 외할머니 사이에 다정한 때가 있었을 것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아는 둘의 모습은 독기를 품고 쏘아붙이는 엄마와 듣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문 할머니뿐이다.
나도 엄마처럼 될 것이 두렵다. 끝까지 엄마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할까 봐. 그러나 진정한 화해란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전에는 내게 상처 준 것들에 대해 엄마에게 사과받길 원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이제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화해는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이대로 덮어둔 채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내 안에서 저절로 엄마를 용서하게 될 날도 올 수 있는 걸까. 엄마는 할머니의 차가운 뺨을 만지며 울던 그 순간에는 진심으로 할머니를 용서했을까? 원래 모녀 관계는 애증의 관계라던데 모두 얼마큼의 깊이를 지니고 사는지 알고 싶다. 그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