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 오던 날

by 자향자

여름철, 햇볕을 한 껏 머금은 아스팔트 위를 뛰다 보면 종종 보이는 풍경이 있다. 아지랑이 같이 지글지글 올라오는 열기를 통과하고 있는 러너의 모습. 그 열기 덕분에 정신을 올곧게 잡기 쉽지만은 않은 계절이 여름이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이따금 더위를 먹는 날도 있으니 이 계절의 러닝은 지옥 훈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름철의 러닝은 그만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여름철 러닝의 재밌는 요소 하나를 고른다면 나는 우중 러닝을 뽑고 싶다. 여름 내내 덥고 습한 기온을 맞아가며, 달리기를 한 러너들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는 생각이다. 웃기는 소리일런지도 모르겠다. '비를 맞으며 뛴다는 것'을 대부분 상상해 본 적 없을 테니까. 우산을 쓰고 뛰어도 모자랄 판에 맨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달린다니. 상식선에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날은 장마철이었다. 어느 날 비가 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그런 시기. 매주 딱 한번 러닝을 해왔던 내게 장마는 크게 고려할 사항은 아니었다. 비가 안 오면 당연히 뛰는 거고, 반대로 장대비가 와도 무조건 뛰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회도 석 달을 남겨두고 있었으니, 매주 한번 치러지는 러닝 연습이 내겐 수능을 앞둔 모의고사와 같이 소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말을 맞이해 러닝을 준비했다. 출발 전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오전 중 비소식이 또다시 예고되어 있었다. 그 전날 장대비가 내린데 이어 당일도 비소식을 전하는 기상청이었다. '이번엔 못 맞추겠지.' 혼자 중얼거리며 옷을 입고 있던 찰나, 아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좀 있으면 비 올 거 같은데."

"괜찮아, 비 오면 비 맞고 뛰지 뭐."

"에? 그러다 감기 걸려. 가지 마"

"더운데 잘 됐지 뭐. 나 다녀올게."


본래부터 몸에 열이 많은 내게 여름철의 러닝은 늘 부담스러웠다. 조금만 뛰어도 땀이 한 바가지로 흘렀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헤어밴드까지 충분히 적셔 수용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늘 두 빰으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곤 했다. 러닝 후에 땀을 흠뻑 머금은 헤어밴드를 꽉 짜주는 게 여름 러닝의 일상이었다.



사실 비를 맞으며 뛰어본 일은 여태껏 없었다. 어떤 느낌인지도 그리고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는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당시엔 비 오는 날의 러닝이 꽤 괜찮아 보였다. 불타오르는 것만 같은 내 몸을 장대비로 식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러닝 시, 보통 공원을 크게 두 바퀴 정도 뛰고, 길게 늘어진 하천을 따라 중장거리 러닝을 하는 편이다. 이날 역시 그러한 루틴으로 진행했다. 공원을 뛰고 하천변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내가 간과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전날 쏟아진 장대비로 인한 환경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 하천의 풍경은 어땠을까? 출입통제라는 안전띠가 쳐 저 있고, 그 너머로 황토색 시뻘건 물이 하천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한껏 차올라 있었다.



곧장 포기하고 일단 하천 위 보도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공원을 계속 도는 건 재미없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신호도 많고, 뾰족이 튀어나온 보도블록으로 러닝을 계속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별다른 왕도가 없어 그냥 앞으로 내달려 보기로 했다. ('계획이 없었다.'라는 말이 정확하겠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잠시 멈춰있던 찰나, 빗방울이 툭툭 지면에 닿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시작한 것. 이날의 일기예보는 내 예상과 180도 다르게 딱 들어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대 같은 비가 후드득 하며 쏟아졌다. 옷과 신발은 어느새 흠뻑 젖어버렸다. 선글라스에 빗방울이 튀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탓에 시야 확보도 어려웠다.



'되돌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즐겨보자.'란 마음뿐이었다. 물을 한껏 머금고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스펀지처럼 물을 뱉었다 머금었다를 반복하는 신발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비 맞은 생쥐꼴로 장대비를 맞으며 달리는 모습을 누군가 봤을지 모르겠다. 아마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날 나는 지난여름 훈련한 어떤 날보다 가장 속 시원한 러닝을 즐길 수 있었다. 번쩍이는 번개 아래 쏟아지는 비를 맞고 한발 한발 내딛으며 더위를 날려버리고, 동시에 내가 살아있음 또한 다시 한번 느꼈다. 목적지 없이 전속력으로 앞으로 내달려보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입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먹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날 나는 혼자 영화 한 편을 찍었다.



그렇게 내리 15킬로를 뛰었다. 비록 장거리 러닝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기분만큼은 최고였다. 물에 빠진 생쥐꼴로 홀딱 젖어 집에 돌아온 나를 보고 아내의 핀잔이 이어졌다. 개의치 않았다. 그날 나는 최고의 러닝을 전개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평생 기억에 남을 달리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중러닝. 러닝을 즐기는 이들에게 한 번은 추천하고픈 훈련이다. 특히나 여름철에 꼭 한번 맛보았으면 한다. 한 겨울도 아니니 감기에 대한 염려는 접어둘 수 있고, 그저 시원함을 즐기면 그만이다. 컨디션에 대한 걱정이 있다면 우비 하나 정도 걸치고 비를 맞으며 뛰어보는 건 어떨까. 당신에게 필요한 준비물은 운동화 한 켤레 그리고 여름철 비 오는 그 어떤 날, 딱 두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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