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 한번 그렇게 처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껏 내가 해왔던 것은 그저 어느 책에서 봤던 표현을 빌려 보자면 '낮은 수준의 노력'에 불과했다. 겉보기엔 '열심히 뛰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실제론 알맹이 없는 속 빈 강정이었다. 맞다. 발전이 없었다.
주중에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한 번이라도 더 내서 뛰었어야 했고, 여름철임을 감안해 주말엔 더 일찍 일어나 선선한 날씨를 등에 업고 내달리며 거리를 조금씩 늘렸어야만 했다. 그게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세였다. 마라톤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하늘이 벌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다시 돌아온 한 주 간 수없이 많은 생각이 맴돌았다. '다시 뛰다가 또다시 더위 먹으면 어쩌지?', '이번 주말, 이겨낼 수 있을까?' 다시 뛴다고 무턱대고 나섰다가 제 풀에 다시 고꾸라지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 주엔 체력 회복을 위해 하루 쉬어가며 수액을 맞기도 했고, 무리도 하지 않았으니 '다시 해보자.'란 말을 수 없이 외치며 금요일을 맞이했다. 하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다가도 더위를 먹었던 악몽이 스치듯 떠오르면 내면의 단단함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곤 했다. 별 왕도는 없었다. 이겨낼 방법은 다시 부딪히는 것뿐이었다.
어느새 주말에 다다랐다. 내가 만들어놓은 벽을 부수기 위해 러닝길에 올랐다. 그날은 조금 다른 길로 러닝을 해보기로 했다. 같은 코스를 달리며 퍼져버린 내 모습을 또다시 떠올리기 싫은 이유가 첫 번째였고, 풀코스 대비해 다소 짧았던 코스를 개선할 필요도 있었다. 명분은 충분했다.
보통 집 주변 공원과 하천변을 중심으로 러닝을 했다. 공원을 크게 두어 바퀴 돌고 하천을 왕복하면 대략 15킬로 정도 되는 거리. 풀코스를 대비한 러닝 연습에 적당하다고 볼 수 없는 루트였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하나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자동차로는 많이 다녀봤지만, 두 발로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곳. 바로 연접한 시흥이란 도시에 있는 물왕저수지였다. 대략 가늠해 보니 20킬로 남짓한 거리. 만약, 그곳까지 달릴 수 있다면, 지난주 내 머릿속을 꽉꽉 채웠던 별로였던 상심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의 달리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오전 8시 남짓한 시간, 러닝을 시작했다. 습도는 여름 내 한결같았지만, 선선한 기온을 휘두르고 러닝을 즐기는 일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새로운 활로를 개척이었다. '여름철에는 일찍 뛰는 게 장땡이구나.' 란 사실을 다시 확인했고, 덩덜아 하천 주변 평지에서만 뛰던 내가 언덕이 있는 구간도 뛰어보며 환경의 변화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잡스러운 생각을 100가지 정도 했을 즈음, 내가 사는 지역을 넘어 시흥으로 넘어왔다. 매 킬로마다 알림을 주던 앱이 어느새 '11킬로를 돌파'라는 사운드를 내뱉었다. 그러했다. 지난주, 내게 벌어졌던 참사를 내 두 발로 다시 깨뜨린 순간이기도 했다. 경기도 시흥의 한적한 동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주변엔 사람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나무가 뿜어내는 신선한 내음과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뛰던 나는 지난날의 트라우마를 내 발로 걷어차버렸다.
그날 나는 18킬로를 주행했다. 목표한 25킬로까지 달성할 순 없었지만, 이날의 기록이 상징하는 바는 꽤 컸다. 단순하게 체력 훈련을 하는 것을 넘어서 내 안의 두려움을 극복했고,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이후의 내 러닝 거리가 더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인생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본 적은 있었는지, 그리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해봤는지'라고 말이다.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는 동물이기에 당연함 직도 하지만, 그 두려움에 제대로 맞설 수 없다면 사실 당신과 내가 꿈꾸는 그 어떤 장밋빛 미래는 없다.
인간은 두려움을 회피한다. 나 또한 회사에서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될 때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앞에 두고 망설이기도 한다. 한편으로 치솟는 물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번 생은 망했다며 자포자기한 사람들도 여려 보인다. 그들의 마음도 십분 이해한다만, 결론은 하나다. 두려움에 맞서지 못한 이들일 뿐이다.
상황이 당신을 좌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나와 당신의 생각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나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인간이다. 하나, 두려움을 깨치지 위해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여러 가지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 이 길로 가는 게 어렵다면, 다른 길로 돌아가면 된다.
마라톤을 통해 겸손과 용기라는 단어를 다시 배워간다. 자만은 목표를 무너뜨리며, 끝까지 달린 그날은 여러분에게 용기라는 선물 한 보따리를 선사할 것이다. 한 끗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여러분과 나의 삶에 건투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