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박성수 씨도 어느덧 공무원 3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간 성수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부서 한번, 담당 업무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이 바뀐 것이 그의 삶에 주어진 변화의 전부다. 나머진 아쉽게도 그대로였다. 공무원으로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 아니었냐고? 그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다.
그간 몇 차례 지랄 같은 민원을 받고 난 이후부터 성수 씨는 이 조직의 순리에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혼자 만의 외침은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였겠지.
아침 8시 50분에 출근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서고 한편에 어설프게 만들어 놓은 탕비실 같지 않은 탕비실 정수기에서 물 한잔을 텀블러에 가득 담은 후 다시 자리에 앉아 전날 하던 일을 이어서 진행했다. 울화통이 터지는 건지 속이 타는 건지 알리는 만무하다.
숨 돌릴 참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내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아침 출근길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걸린 어느 기사 하나가 기억에 남아, 저가 커피집 한 곳에서 팀원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점심을 그렇게 때웠다.
다시 돌아온 오후 1시 일과시간. 직원이 자리에 온 것을 마치 아는 것 마냥 귀신같이 전화를 해대는 민원인 덕분에 성수 씨의 오후 일과는 또다시 빠르게 흘러간다.
그나마 일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팀장 덕분에 당일 보고해야 할 일은 내일로 미룰 수 있게 됐다. 오후 6시 무렵 듀얼 모니터에 한 움큼 열려있는 파일 폴더를 하나씩 닫아나간다. 맞다 퇴근시간이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짧은 말을 뒤로하고 부리나케 성수는 사무실 문밖을 나선다. 이런 삶을 살아온 지 어느덧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실 성수는 이렇게 매일의 반복되는 패턴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성수는 지난 3년 동안 이 조직에 있으며 배운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나대지 말 것.
둘째, 절대 튀지 말 것.
셋째, 시키는 건 빠르고 정확하게.
넷째, 묻는 말엔 최대한 짧게 대답할 것.
그게 지난 3년 동안 성수가 조직에서 배운 전부였다. 고졸 출신이면 누구든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니 단순하기 그지없었다고나 할까. 내성적인 성수 씨의 성격에 딱 알맞았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조직에 많이 있었다.
신입 때 같이 들어온 동기 중에 강태수라는 남자직원 하나가 있었다. 말이 많았고, 생각이 많았으며, 늘 회의 때마다 질문은 끝이 없는 동기였다. 과장은 처음엔 그를 좋아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갈 인물이라나 뭐라나. 이런 사람이 많아져야 조직이 더 창의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아마 수십 번은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니 과장의 태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싫어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6개월이 지날 무렵부턴 태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자 태수는 갑자기 민원실로 발령이 나게 됐다.
성수는 그걸 보면서 이 조직의 생리를 배웠다. '절대 나대면 안 된다.'라는 철칙이었다. 그렇다고 성수가 아예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쭈뼛대는 성격이 조금 아쉬웠던 것뿐이지, 시키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빨리 끝내는 사람이었다.
실수는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끝까지 책임지고 마무리를 지었다. 데드라인을 어긴 적도 손에 꼽았다. 그리고 거지 같은 민원인이 사무실로 찾아와 다짜고짜 화를 낼 때도 절대 목소리는 높이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평판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모난 것 없고, 시키는 대로 하는 말단 직원이니 일단은 합격이었다.
"박주임은 어떻게 그렇게 민원인을 잘 구슬려?"
"그냥 하는 거죠. 뭐."
그게 아마 칭찬이었을 게다. 그 말을 들을 찰나에도 성수는 그 말이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해 3월 중순, 팀에 새로운 직원이 배치됐다. 최병철. 7급 주임. 나이는 성수보다 두 살 위였다. 처음 보는 날 그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웃음을 지었다. 새하얀 이. 부럽게도 치아가 정말 고른 사람이었다.
"잘 부탁해요, 박주임님."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우리의 첫 대화였다. 성수는 최병철에게 특별한 인상은 따로 받지 못했다. 그냥 '또 한 명이 왔구나, 저 사람은 언제 도망가려나?' 싶을 뿐이었다.
성수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병철은 한 달 만에 사무실 분위기를 싹 바꿔놓았다.
그는 언변이 좋았다. 특히 과장 앞에서 청산유수같이 흐르는 특유의 화법은 어마무시했다. 더불어 과장, 팀장이 좋아할 만한 페이퍼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특히 보고서의 형식이 정말이지 깔끔했다. 윗사람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본능적으로 캐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최병철은 또 다른 스킬 하나가 있었다. 바로 일을 알게 모르게 토스할 줄 아는 능력.
자신의 일이 바쁠 땐 성수에게 넌지시 넘길 줄 아는 희대의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도 처음부터 그런 능력이 있는 줄 스스로 알고 있었을까? 사실 처음엔 부탁하는 말투였다.
"박주임. 이거 나 대신 좀 처리해 줄 수 있어요? 내가 지금 위에 급하게 보고할 게 있어서."
"네네, 알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몇 번 일을 대신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잔잔바리 그의 업무는 암묵적으로 성수의 것으로 되어있었다.
"이거 박 씨가 하는 거 맞죠?"
"네? 뭐가요?"
"일전에도 해줬었자나. 부탁해요."
"네." (아. 저 XX가.)
성수는 윗선배에게 그 부당함을 당당히 말할 순 없었다. 쫄보인 성격도 한 몫했고, 혹시나 선배에게 대드는 이상한 후배라고 소문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최주임은 그 후에도 성수에게 꽤 많은 잔업무를 그에게 슬그머니 밀어놨다. 그냥 올려놨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테다. 그런데도 성수는 그 무례한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귀찮았고 두려웠다. 거절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어색해지면 계속 신경 쓰일 게 뻔하고 일하기 불편해질 걸 예단했다. 그래서 그냥 빠르게 처리하는 게 되레 편했다.
그와 같은 일이 한참 반복될 무렵. 옆 팀 이 주임이 성수에게 메신저로 한마디 말을 건넸다.
"박주임님, 최주임님 일이요 왜 계속 대신하는 거예요?"
"뭐, 바쁘다고 해서요."
이 주임이 키보드에 무언가를 쓰려는 것을 멈추고 잠깐 성수를 지긋이 바라봤다.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 이내 관두고 만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와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성수는 그 눈빛의 의미를 나중에야 알게 됐다. 3년 차 연말 인사고과.
'최병철 S등급'.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홀로 고군분투하며 거지 같은 일을 도맡아 해온 성수는 B등급이란 초라한 결과물을 손에 쥐게 됐다.
일 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 한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한 과장이 성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박주임. 성실한 거 나도 아는데, 주도성이 좀 부족해."
"네네. 맞죠."
"너무 서운해 마. 나도 고심한 거야."
"그럼요. 한잔 하시죠."
쓰디쓴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성수는 민원실로 쫓겨난 강태수를 떠올렸다. '주도적으로 일하면 강태수처럼 되는 거 아닌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주도성이 부족하다니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데.'
말없이 소주 한잔을 들이켜고 다 타버린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다. 취기가 조금 있는 채로 터벅터벅 집에 돌아와 가스불을 올리고 라면 하나를 끓이며 말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결혼을 해야 하나."
정말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사실 가끔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날 드는 생각이기도 했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이런 상황이 좀 위안이나 될까. 집에 돌아오는 길, 우리 집에 불이 켜져 있으면 일말의 위안이라도 되는 걸까. 하고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거지"
어느새 라면은 다 끓었다. 푹 익은 라면 면발에 엄마가 보내준 김치 한 점을 얹어 홀로 후루룩 한 접시를 그대로 비워냈다. 성수는 아직까지 혼자가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