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계절, 박성수와 한지영은 다섯 달째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애라고 하기엔 너무나 조용했고, 단순한 만남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한 만남이 계속 이어졌다.
주말마다 그 둘은 만나 밥을 먹었고, 가끔 영화를 봤으며 이따금 산책을 즐겼다. 손을 잡은 건 아마 두 번째 만남부터였을 것이다. 심지어 그 둘 사이 손을 먼저 잡은 건 지영이었다.
어느 날 횡단보도 앞에서 둘은 신호를 기다리다 지영은 그냥 성수의 손을 잡았다. 그뿐이었다. 성수는 사실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녀 앞에서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고 그 둘은 아무런 일이 없단 듯이 보도를 건넜다. 그게 그 둘, 진지한 만남의 시작이었다.
사실 성수는 별다른 고백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매일 오고 갔고, 어느 순간부터 주말엔 무얼 하는지 서로 물어봤을 뿐이며, 결국 서로의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까지 알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 둘의 연애는 시작됐다. 어느 선언도, 어느 이벤트도 없이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수는 그게 편했다. 물론 지영도 나쁘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지영의 원룸에서 둘이 함께 만든 김치찌개. 그들의 저녁이었다.
성수는 블로그에 나온 레시피 대로 김치찌개를 끓이고 지영은 특유의 솜씨로 언제나 만들어 먹던 계란말이를 가뿐하게 만들고 있었다.
원룸 특유의 좁은 부엌은 그들을 자주 부딪히게 만들었다. 지영이 살짝 짜증 썩인 목소리를 전한 게 살짝 아쉬운 정도였다고나 할까 일부 겉 부분이 검은빛이 도는 계란말이를 보며 지영이 한숨을 쉬었다.
"됐어, 그래도 먹을 만해."
"맛있어 보이는데."
"탄 거잖아."
"그래도. 괜찮고만"
지영이 성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뭔가 말하려다가 꾹 참고 그냥 둘은 나란히 앉아 교자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이어진 설거지. 그들의 패턴은 일정하다. 성수가 수세미로 접시를 대차게 문질러주면 지영이 닦는 패턴. 이 또한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러워진 일이었다.
단출한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마친 둘은 소파에 앉았다. 딱히 볼 것은 없지만 언제나 리모컨을 들고 틀게 되는 넷플릭스. 스크롤을 넘기며 눈길이 가는 어느 드라마 하나를 선택하고 라디오처럼 듣는다. 나름 신경 써서 고른 영상이지만 이를 보지 않으며 핸드폰을 보는 건 진즉 오래됐다.
30분 무렵 흘렀을까. 지영이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 얘기 슬슬해야 하지 않아?"
"응?"
"결혼 말이야."
그녀의 말을 듣고 성수는 지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영은 그의 시선이 닿는 걸 알고 있지만 애써 눈길을 TV로 돌리고 있었다. 연이어 그녀가 말했다.
"나 벌써 서른둘이야. 성수 씨는 서른다섯이고. 만난 지 다섯 달 됐고. 우리가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면 결혼 얘기를 언젠가는 해야 할 거잖아. 그러면 지금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
"그런가."
"그런데가 아니라 그냥 이즈음엔 해야 할 말 아닌가 싶어."
"지금 나한테 프러포즈하는 거야?"
지영은 성수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니. 그냥 현실적인 얘기하는 거야."
그 찰나, 지영은 테이블 한편에 있는 노트를 꺼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성수는 그걸 보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저 참고 있을 뿐이었다. 노트엔 지영이 미리 써온 것 같은 뭔가 적혀 있었다.
"내가 정리해 봤어. 우리 둘 다 공무원이고, 합산 연봉은 지금 이 정도 될 거고, 현재 각자 전세 보증금이 얼마. 모아놓은 돈은 대략 이 정도야. 결혼하면 신혼집 마련 해야 할 텐데, 그러면 아마 대출이 이 정도 생기지 않을까."
구체적인 숫자들이 촤르르 나왔다. 이를 보고 들으며 성수는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나보다 더 현실적이네.' 지영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양가 부모님 상황은 양쪽 다 크게 도움받기 어렵고. 그러면 우리 둘이 감당해야 하는데, 지금 각자 살면서 월세 이중으로 내는 것도 낭비고, 어차피 계속 만날 거라면 합치는 게 경제적으로도 맞는 거 같아서."
그녀의 말은 그렇게 끝이 났다. 성수는 그녀가 빼곡히 기록한 노트를 차근히 살펴봤다. 지영이 머리를 싸매며 쓴 숫자. 정말이지 꼼꼼했다. 당시 성수의 기준에 빠진 항목은 딱히 없었다. 맞다. 그녀도 공무원이었다.
"진짜 낭만이 없다." 지영이 눈썹을 약간 올리며 성수에게 말했다.
"낭만 있는 결혼 하고 싶어?"
"아니."
"그럼 됐잖아."
그날 밤 두 사람은 평소보다 더 긴 밤을 보내며 두 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결혼 규모는 어떻게 할 건지, 상견례 시기 그리고 신혼집을 구할 지역 전세인지 매매인지. 아이는 언제 낳을 건지, 부모님의 간섭은 심한 편인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죄다 꺼냈다.
성수는 지영과 이런 불편한 이야기 하며 이상한 편안함을 느꼈다. 맞다. 일상적인 편안함은 아니었다. 그저 마치 오래 헷갈렸던 수학 20번 문제의 풀이 과정을 누군가 조목조목 짚어주는 것 같은. 그런 편안함을 느꼈다.
지영은 감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흥분하지도 않았고, 그저 해야 할 말을 순서대로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 그 메모장이 없었더라도 그녀는 그렇게 청산유수와 같이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성수는 그녀의 방식이 좋았다. 자신과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느낌이었으니까. 자정이 넘어서야 성수는 일어날 수 있었다.
"가야겠다."
"응."
"상견례는 3월 말이 좋겠어."
이 말이 끝나자마자 지영이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3월 셋째 주 토요일."
"어머니한테 말할게."
"나도 말할게."
성수는 코트를 입으며 현관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그 순간 지영 앞에서 뭔갈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창한 프러포즈 같은 건 아니더라도. 뭔가. 이 사람과 살기로 했다는 게 의미 부여하는 메시지를 지영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성수는 별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머뭇거릴 찰나 지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잘 가.
"응."
문을 열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성수는 생각했다. '됐다. 아주 잘 됐다. 이 사람이면 충분하다.' 성수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갈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2016년 10월 12일. 박성수와 한지영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식장은 크지 않았고, 하객은 단 100명에 불과했다. 저렴한 패키지로 모신 사진작가가 결혼식 내내 연식 뛰어다닌 게 아니었다면 몹시나 초라할 뻔했다.
짧디 짧은 결혼식을 마치고 떠난 4박 5일 여정의 일본 나고야의 신혼여행이 그들 결혼 레퍼런스의 마지막이었다. 계획한 숫자 안에서 모든 건 그렇게 끝이 났다.
제법 멋들어진 원피스를 입은 지영이 가방 구석에 있던 노트를 꺼내 마지막 항목을 체크했다. "오키, 완료." 성수는 그 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 사람.. 평생 이러겠구나. 근데 나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