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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기 Apr 25. 2022

미술학원 첫 도전, 선긋기도 재미있다

기록하는 2022년│Episode 77│2022.04.21

초등학교 6학년 때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등록하려면 입학시험에 통과해야 하는 곳이었는데 본인 모습을 그리라는 문제에 엄청 긴장하면서 나를 그렸다. 그런데 선생님이 내가 진지하지 않고 장난친다고 나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때는 굉장히 억울하고 속상했는데, 지금은 내가 뭐 장난을 쳤나 싶다. 어쨌든 그 미술학원은 갈 수 없었고, 그 뒤로도 미술학원은 다니지 않았다.


그 후 미술학원을 다녀볼까. 생각은 종종 하긴 했는데 고민만 많았다. 미술보다 먼저 배워야 할 시급한 것들이 많다. 미술 학원을 다닐 시간이 없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미술을 배우나 등등. 돌이켜보니  그냥 모두 다 핑계다.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데 막상 배웠는데 여전히 못 그릴까 봐. 나는 아주 조금의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길 바라는데, 아예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봐. 그래서 자꾸 이런저런 핑계들로 미술 학원 등록을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놀이터 앞에 미술학원이 생겼다. 집에서 가깝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있다. 시간도 딱 맞는다. 목요일 저녁 7시. 남편의 중국어 수업시간이다. 이곳이라면 더 이상의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다만 성인 취미 미술반 개강은 조금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개강하게 된다면 그날이 언제건 바로 등록하겠다고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 삼 개월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연락이 왔다. 다음 주 목요일에 첫 수업 예정이라고. 예정대로 수강 가능하냐고. 나는 일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등록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첫 수업 날이다. 


어떤 것이 하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오라고 하셨는데 난 특별히 무엇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열심히 배워서 잘 그리게 되면 그 언젠가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고, 나를 닮은 이모티콘도

만들고 싶다. 그리고 크게 그려서 집에도 걸어두고 싶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기도 하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내 기준에는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들을 손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 없을 정도다. 


선생님은 어느 정도 무엇인가를 구현해내려면 기초를 잘 다져놓는 것이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꼭 그렇게 그리는 것이 잘 그린다고 할 수 있을지(나와 맞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와 지금 그렇게 기초만 집중해서 하다 보면 그림 자체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일단 당분간은 기초를 다져보고, 너무 재미없어서 지루해질 것 같으면 그려보고 싶거나 해보고 싶은 것들을 찾아오겠다고 했다. 체계적이지 않으면서도 체계적인 것 같고, 자유롭게 정해나갈 수 있는 커리큘럼이 꽤나 마음에 든다.


그래서 오늘은 두 시간 내내 선긋기를 했다. 

먼저 왼쪽에서 오른쪽, 가로선으로 흰 종이를 가득 채운다. 그다음 위에서 아래. 세로선으로 그 위를 다시 채운다. 그리고 그다음은 각각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대각선으로 덮는다. 가로선은 익숙해서인지 비교적 쉽게 느껴졌다. 그에 반해 세로선은 이상하리만큼 잘 그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단순한 선인데 어쩌나 구불구불, 삐뚤삐뚤한지 당황스러웠다. 


한 장을 다 채웠을 때 선생님이 선을 그만 긋고 다른 무엇인가를 하는 방법도 있다고 제안해주셨으나 마저 선을 그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흰 종이를 선들로 채워갔다. 두 번째 종이는 빽빽한 가로선과 반 정도의 세로선이 남았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어색한 연필 잡기에 어깨가 아프고, 좀이 쑤셨다. 하지만 뭐랄까. 이 마저도 재미있다. 우선 흰 종이를 내가 그은 선으로 가득 채워가는 것 자체로 충분히 행복했다. 한편으로는 도를 닦는 기분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짜증 나는 일들과 미운 생각들로 가득 찬 마음이 선 하나 그을 때마다 조금씩 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 바로 선이 바로 삐져나가서 결국에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선 긋기를 했다. 멍 때리는 것이 분명 아닌데, 이상하게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겨우 첫 수업을 마치고 이렇게나 부푼 마음으로 이러쿵저러쿵 미술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나의 미술학원 첫 도전을 꽤나 성공적인 것 같다. 두 시간 꽉 찬 선긋기마저 충분히 즐거웠다. 오늘의 미술학원이 내일의 내 하루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부디 지치지 않고 잘 즐겨나가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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