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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ssion Azumma Feb 26. 2024

이제 더 이상 나빠질 게 없습니다

휴지심도 우습게 볼 게 아니었네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시작은 남편이었을 겁니다. 하도 이상한 걸 많이 하는 양반이니까. 다 쓴 휴지심을 무심코 툭 던졌는데 한 번에 훅 세워진 거죠. 이걸 무슨 하늘의 계시인 것 마냥 들떠서는 그다음부터 세울 만한 모든 것들을 세우기 시작했죠. 우리 집은 아무래도 여성 비율이 높다 보니 화장실 휴지 사용량이 좀 많은 편이라 휴지심도 이삼일에 하나씩 나오기에 하나의 재밋거리처럼 어느샌가 온 가족 모두 내가 질쏘냐 휴지심 세우기에 열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우기 시작한 휴지심이 오갈 데를 잃어 주방 빈 켠 한 곳에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제 범람 수위에 이르러서 대책 마련이 시급해졌어요.


"아빠 방(안방) 발코니에 쌓으면 어때?"


물론 제 의견입니다. 꼴 보기 싫은데 꼴 보기 싫은 양반 방에 몰아넣자 뭐 그런 건지요. 여하튼 거기만큼 제약 없이 앞으로도 쭈욱 쌓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우리 집엔 더 이상 없다. 아주 그럴싸한 의견이기에 만장일치로 결정이 났습니다.


"자, 이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

"다 무너뜨리고 새로 쌓아요!"

"그래? 그러자 그럼"


그렇게 우리의 휴지심 쌓기 배틀이 시작되었습니다. 게임 참가자는 나와 곧 중딩, 곧 초6 세명.

총 22개의 휴지심을 최소 6개 이상씩 쌓고 그 마지막 키친타월 심을 던져 세우는 사람이 최종 승자가 되는 걸로 정했습니다. 출발은 제가 1등입니다. 순식간에 8개의 휴지심을 세웠어요. 그동안 아이들과 게임을 하면 항상 머리 굴려 져 주려고 하거나 놀아주는 척만 했던 제가 이기려고 아등바등하는 겁니다. 그리고 도전한 키친 타월 세우기. 아오... 진짜 이게 뭐라고 진심인데? 아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내가 참 못났다 싶은데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또 뭘까요? 그 사이 막내가 여덟 개의 휴지심을 세우고 키친타월에 도전합니다. 둘째가 영 시원찮기에 우리가 두 개씩 더하기로 중간에 룰을 살짝 바꿨기에 나와 막내는 8개, 그때까지만 해도 둘째는 4개도 못 세우고 고전분투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씩 돌아가면 키친타월 심을 던지던 중 둘째가


"앗싸 나도 6개~~~~ 다 죽었쓰~~~"


다 죽긴 지가 제일 못하면서. 우리는 썩소를 날리면 해볼 테면 해보라지 계속 도전을 이어갔어요.

어라... 근데 이게 무슨... 둘째가 한 방에 키친타월 심을 세우며 한 밤중 휴지심 세우기 도전은 반전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 셋 다 얼굴이 웃다가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아이들과 놀 때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가 열정 열정을 외치지만 늘 그렇지 못했던 건 아닌가 아이들과 놀아줄 때도 건성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 자체가 건성건성이었던 건 아닌지 나 혼자 입으로만 최선이었다고 애써 나를 두둔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시작을 하면 끝을 봐야 한다고 늘 주장하면서도 막상 단기간의 목적을 세우고 나면 그걸로 끝. 짧은 파이팅과 긴 휴식기. 늘 그랬던 거 같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그냥 세월에 떠밀려 엄마라는 타이틀만도 버거워하며 보낸 세월들이 아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도 이제 다들 오십이 되어 갑니다. 친구들 중 제법 똑똑했던 친구는 오랜 시간 고민 후에 다시 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답니다. 석박사 과정을 밟아서 일본어교수가 되겠다는 야무진 목표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친구입니다. 아이가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그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답니다. 그 친구와 통화하며 내 삶은 오히려 너무 순탄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늘 편안함에 익숙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최선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스스로 오늘을 마감 지어 버린 건 아니었나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타로카드가 이제 더 이상 나빠질 건 없다네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공백기가 길었고 그동안 많은 고민들을 했어요. 인생 2막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죠.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를 두고 망설였습니다. 그냥 시작하면 되는 것을요. 목표도 세웠으니 그냥 한 발씩 떼면 되는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휴지심을 던질 때처럼 일단 던지면 한 번이든 두 번이든 실패야 하겠지만 언젠가는 세워진다는 것을요. 아이들과 휴지심을 던질 때 느꼈던 그 쾌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내 인생도 볼 빨간 사춘기를 맞이할 수 있기를!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야 제대로 된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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