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밖에 모르던 남자와 집 밖에 모르던 여자의 인생 2막
삶은 계란이다.
시간을 정해놓고 삶아도 계란의 익기 정도는 불과 물의 양과 함께 들어 있는 계란의 수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늘 목표를 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지만 삶고 있던 계란이 하나 터지면서 다른 계란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처럼 내 인생은 내 달걀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일이란 본인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일밖에 몰랐어요. 일이 너무 재밌어서 주말에도 직장을 찾을 정도로 일에 미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 직종에서 20년의 시간을 보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허용하는 것이 힘든가 봅니다. 입사 때부터 그의 스펙은 늘 다른 이들의 부담을 샀고 그래서 나아가는 꼴을 보는 걸 대놓고 싫어한 상사, 동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만의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내 남편은 겸손하지 못했고 배려 깊지 못했습니다. 늘 남들을 자기 보다 평가절하했고 그래서 적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본인도 알죠. 하지만, 그런 그의 열정을 좋아한 직원들도 많았습니다. 어찌보면 승진 줄에 목메지 않는, 일만 아는 바보들이지요. 얼마 전, 그 바보 전 직장의 후배들이 신년인사랍시고 찾아왔어요.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 준 그 친구들에게 너무도 고맙다고 한참을 얘기했었죠. 아는 사람은 안다. 그 믿음 하나로 버티고 있는 사람입니다.
며칠 전 구독 중인 별검무적 작가님이 글을 올리셨어요. 보자마자 제 남편의 카톡 대문명이자 매일 읊조리는 말..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는다"
보자마자 작가님의 글에 댓글을 달았어요. 뭐에 홀린 듯 처음으로 작가님의 글에 댓글을 남겼죠. 분명 작가님의 글은 내 남편의 상황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생각을 누군가가 어필해 주는 데에 감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댓글에 별검무적님은 "부군께서 가슴에 큰 칼 하나 품고 사시는가 보군요"라고 답해주셨어요.
맞습니다. 자진퇴사하였지만 그 뒤엔 다른 배경이 있었습니다.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이 회사에 대한 예의이자 또 복수였습니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보낸 곳에 미련이 왜 없겠습니까? 제가 가끔 그 사람들이 밉지 않냐 물어보면
"때가 되면 그들도 알게 될거다. 그게 내 복수다."
'B급은 절대 A급을 밑에 두지 않는다.'
언젠가 어느 미디어에서 접한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월등한 꼴을 못 본다네요. 맞는 말이지 싶었습니다. 실적을 좋게 내면 가로채기 일쑤였고 너때문메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대놓고 타박하던 남편의 전 직장 동료들이 생각났습니다. 제 남편이 A급이란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권력은 한 번 손아귀에 쥐면 내려놓기가 참 힘이 드나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명함 앞에 붙는 직함 하나에 목숨 거는 사람들을 보면 말입니다. 정치인도 일반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욕망일까요? 남편이 퇴사 후에 직장 내에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더군요. 모두의 이기심이 한 사람을 밀어낸 거라고. 억울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억울함 속에서 배울 것은 또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남편과의 24시간 동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년 남짓 지났나 봅니다. 남들은 갑갑해서 어떻게 사느냐 하지만, 저도 이 사람도 서로에 대해서 지금처럼 잘 알고 있었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서 공부 중입니다. 그동안 서로 너무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는 일에서 실적을 내느라 바빴고 저는 시부모와 아이들 챙기느라 바빴습니다. 남편은 직장을 잃었고 또 우리는 아버님을 잃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런 결핍 속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깨닫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남편의 현재 타로카드를 열어봅니다. 신기하게도 현재 상황과 맞는 거 같은 건 제 기분 탓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가장으로서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일이 재밌기만 했을까요? 부양의 의무를 가진 남편의 어깨 위 돌덩어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가족과 직원들 또 회사까지 혼자서만 무겁고 많은 책임을 이고 지고 살아왔을 겁니다. 그 덕에 건강을 잃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가 병 밖에 없다는 것은 사람을 참 힘들게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고리를 끊어내고 본인과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남편입니다. 24시간 붙어 있다 보니 제 속은 화로 가득 차기도 합니다만, 예전과 달리 요즘은 뱉어 내고 표현하며 절충하며 살고 있습니다. 쉬고 있지만 매일 나아가고 있습니다. 남들 보기엔 느려 보이고 답답해 보인다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자식들이 줄 줄인데 놀아서 될 일이냐 타박하는 주위 분들에게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 당신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바쁘지만 불안한 건 저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느리지만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더디지만 앞으로 한 발짝씩 분명 나아가고 있습니다. 빨리 달리느라 놓치고 보지 못했던 아주 소소한 것들이 보이면서 우리는 화내는 일보다 웃는 일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달팽이처럼 거북이처럼 산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50이 다 되어서야 깨우치고 있지요. 게으르지 않게 내일을 위해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 지금은 그것이 순리이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