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사는 일주일의 휴가를 끝내고 연우와 함께 경찰서로 돌아왔다. 아주 어릴 때, 엄마와 함께 온 적은 있지만, 갓난아기였을 때니 기억할 리가 없다. 박 형사는 연우와 함께 몽타주를 작성하러 왔다. 김 주임은 연우가 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내려와 연우를 안았다. 연우도 오랜만에 보는 시영 이모가 반가웠는지 둘은 한동안 근황 토크에 빠져 중요한 일은 잊고 있었다. 몽타주 작성도 과학수사팀에서 하긴 하지만, 김 주임이 근무하는 감식반은 층이 달랐다.
“김 주임, 사적인 얘기는 일단 끝나고 하자. 저녁이나 같이 먹자. 시간 되냐?”
“네, 오늘 일근요. 내일 아침까지 시간 있어요.”
“참나, 연우야 저 이모는 변한 게 하나도 없지?”
“그래서 좋은걸요. 그래야 시영 이모답죠.”
“어쭈, 쪼그만 게 많이 컸네. 어!! 나중에 우리 할 얘기 많으니까 입 풀어 놔. 이모 간다!”
시영은 연우를 다시 한번 꼭 안아주고 계단으로 사라졌다. 박 형사는 연우와 함께 몽타주 담당자를 찾았다. 연우가 본 운전석에 있던 사람. 그는 연우의 엄마를 태우고 학교 앞을 돌아서 지나갔다. 창문이 열린 틈으로 연우는 그 사람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아주 생생하고 또렷하게 연우의 기억 속에 남았다.
몽타주 속 남자는 낯선 사람이었다. 적어도 박 형사가 아는 범죄자나 조직원들과는 연관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일보 진전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김 주임은 약속 장소를 정해서 보내왔다. 마라탕집. 연우는 아빠는 고깃집을 선택했을 거라며 시영의 센스에 감동한 것 같았다.
“어, 여기. 연우야. 어서 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시영은 연우를 격하게 반겼다. 둘은 신나게 마라탕 재료를 고르러 갔다. 잠시 뒤에 연우가 “아빠는 안 담아?” 묻기에 대충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하고 맥주를 시켰다. 잠시 후 합석한 시영과 술잔을 함께 기울였다. 세숫대야만큼 큰 그릇 세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맥주가 아니라 소주를 마셔야 할 것 같다. 소주를 새로 주문하고 국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꽤 괜찮은데?” 아빠 반응이 궁금했던 딸은 의외로 잘 먹는 아빠를 보고 한시름 놓은 것 같았다.
“박 형사님, 몽타주 사건 파일에 올라왔더라고요. 보고 나왔어요.”
“빠르다 역시.”
한참 얘기 중에 연우가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앞으로 엄마 사고에 대한 건 나도 공유하게 해 줘.”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수저를 놓고 연우를 바라보았다.
“나는 목격자니까, 당연한 권리 아냐?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 경찰대 가려고.”
“연우야. 네가 보기에 아빠나 이모가 기준이라 쉽게 보이나 본데 일반 경찰 시험도 어려워. 경찰대는 말해 뭐해. 더 빡세. 공부 잘해야 해.”
“나 잘하는데? 고등학교 가서도 자신있어. 평생 누군가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사느니 내가 날 지키는 게 더 현명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일반 순경으로 시작하기 싫어.”
“십 년 뒤에 연우가 우리 중에 계급장 제일 높은 거 아녜요? 박 형사님?”
“그러게, 잘 보여야겠다. 연우한테.”
알싸한 마라탕과 연우의 한 방에 어질어질했다. 술 때문인지 잘 커 준 연우 때문인지 박 형사는 흐뭇한 기분에 취했다. 혼자서도 잘 커 준 딸이 기특했다.
일주일을 쉬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출근하자마자 장 부장은 밀린 업무 보고에 여념이 없다. 자잘한 절도 사건들은 이미 기소까지 마쳤고, 국과수 감식 결과를 기다리는 사망 사건이 하나 남아 있었다. 외부 침입이 없고, 다량의 약물을 처방받은 기록으로 보아 고의적 자해 같아 보인다는 검시관의 소견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죽음이든 물음표가 남아선 안된다. 그날 나온 국과수 감식 소견서에는 다량의 펜터민 복용에 의한 호흡 곤란에 의한 사망으로 적혀 있었다. 유족들은 장기적으로 펜터민 처방한 병원을 고발했다. 장 부장은 영장을 받아 해당 병원으로 출동했다. 부쩍 마약 관련 사고가 늘어간다. 얼마 전에도 고등학생이 마약을 처방받아 팔고 잘못 사용하다가 발생한 사망 사건이 있었다, 마약 청정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잠시 국가적 고민에 휩싸였던 박 형사는 연우가 보았다는 그를 다시 살폈다. 마약 운반책이던 남자. 신익수의 아들과 그를 만나러 교도소 면회까지 갔다는 남자. 그는 잡혔을까?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조직원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보다 몽타주 속 남자는 왜 정은이를 데려갔을까? 정은이가 불륜을 저질렀다? 치정살인? 그럴 수도 있다. 원인이 밝혀지기까진 어떠한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연우의 기억을 짚어 보면 정은이가 끌려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발적으로 자기 차의 운전석을 넘긴 것으로 봐야 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젊다. 그 당시 정은이에게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통화 기록과 이동 동선에서도 그런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었다. 생각하다 보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왜? 운전석이 아니라 조수석이었을까? 여태까지는 발견된 현장에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우의 기억이 꿈이 아니라면 그녀는 이미 운전석에서 스스로 조수석으로 옮겨 탔다. 박 형사는 연우에게 다시 물어야 했다.
시영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끝내고 컴퓨터 속에 머리를 집어넣을 태세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마약 운반책이 잡혔다. 신익수와의 연결 고리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다며 순순히 자백까지했다고 한다. 그의 주변을 탐문하고 그의 통화 내용을 모두 뒤졌지만, 신익수와 그의 아들과의 연결 고리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초범에 단독범행. 텔레그램으로 고등학생들을 유인해 펜타닐을 처방받아 판매했다. 초범이라는 게 참작되고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5년 이상은 받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이하일 수도 있다.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을 아는데 출소 후에 과연 새 삶을 살 수 있을까? 그의 머그샷을 보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초범인데, 낯이 익어. 어디서 봤지. 이 새끼….’
박 형사는 연우와 함께 최 수사관을 찾았다. 정은의 사고를 이미 알고 있는 친구다. 김 주임과 동기자 같은 팀이라 소개받고 십 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법최면 수사 전문가다. 박 형사의 사건 중에 그가 프로파일링해 자백을 받아낸 사건도 있다. 연우의 기억이 꿈인지 실제 상황인지 최면 수사로 백 프로 확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는 이보다 더 어려운 사건들도 해결한 베테랑이다. 연우도 어릴 때부터 종종 본 삼촌이라 그런지 마음이 편한 모양이었다. 잠시 앉아서 서로의 근황 이야기를 했다. 연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꿈이 아니라 직접 본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힐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매달려 볼 가치는 있었다. 또래의 딸을 키우는 최 수사관은 연우와의 대화에 막힘이 없었다. ‘역시 난 아직 따라가려면 멀었어. 딸아이랑 막힘없이 대화가 가능하다니.’ 박 형사는 최 수사관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기억저장소로 보냈다.
“바쁜데 미안해. 사건 많지?”
“아무리 바빠도 형수님 일인데요. 그리고, 우리 경찰서 미제 사건이기도 하고…. 제가 할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말이라도 고마웠다. 다들 박 형사에게 그 이야기하는 걸 어려워한다. 유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김 주임과 최 수사관이다. 그들은 애써 감정을 빼고 사건으로 대하는 법을 아는 것 같았다. 김 주임도 언니로서의 경우와 사건을 대할 때는 달랐다. 박 형사보다 더 냉정하게 바라보고 충고해 주기도 한다.
“안 그래도 방금 김 주임한테 전화 왔는데, 연우 여기 오는 거 알고 전화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나? 그 녀석 전생을 들여다보고 싶다니까요. 사냥개였을 거야. 분명히.”
그때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 인사하고 다니는 목소리를 들으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 말이야.”
“이모~~”
“연우야, 우리 또 보네. 아니, 박 형사님! 왜 저한텐 말 안 한 거예요? 최 수사관이랑 일하는 층은 달라도 우리가 엄연히 같은 과학수사팀인데. 너무하네, 진짜.”
“네가 수사할 것도 아닌데 뭐 하러 불러. 여기저기 좀 댕기지 마. 삽살개야?”
“뭐야, 왜 개종을 시키지? 멀쩡한 인간이고만. 연우가 긴장할까 봐 왔지, 내가 뭐 여러분들 때문에 왔을까 봐요?”
“안 바빠?”
“출동 떨어지면 가야죠. 안 그래도 조용히 오늘 지나가길 바라고 있으니까 초 치지 마세요. 박 형사님!”
최 수사관이 낄낄대는 바람에 박 형사는 김 주임과의 말싸움을 중단했다. 잠시 뒤,최 수사관은 두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말했다.
“빨리 끝날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어요. 시작할게요.”
박 형사는 조마조마했다. 김 주임은 고등학교 마약 판매책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
“근데, 그 사건만 보면 신익수랑 관련된 줄은 없어요. 그 어디에도. 전과도 없어요. 서 팀장님이 너무 넓게 생각하신 게 아닐까요?”
“교도소 방문 기록은 있으니까, 전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 사건만 별개의 문제인지. 교묘하게 다 빠져나간 건지.”
“하긴, 근데 어디서 본 놈 같단 말이에요. 서른셋이던데. 그쪽 애들이 그 나이 먹고 전과 없긴 힘든데 그렇지 않아요?”
“그러네, 그건 좀 이상하네.”
“늦게 입문한 건가. 나 참, 출동이야. 박 형사님이 아까 안 바쁘냐고 해서 그렇잖아요. 연우 다 끝나면 전화하세요!”
김 주임은 핸드폰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신신당부하며 급히 사라졌다. ‘서른셋, 초범, 신익수, 면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걸까?’ 박 형사는 곰곰이 그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5년 전, 교통사고, 불륜, 미제 사건, 마약, 신익수, 조직….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최 수사관이 연우와 함께 나왔다. 연우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박 형사님, 꿈은 아닙니다. 구체적이고 명확해요.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