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그만 잘라도 되겠다.
금주일기라고 제목을 붙혔으면 자고로 금주하는 방법으로 열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는....
주욱 써놓은 것을 다시 살펴보니, 얼마나 술을 먹고 꽐라가 되고 빌런이 되었는지에 대한 자기고백같은 글들만 가득했다.
기왕에 빌런고백을 한 김에 마지막 고백을 오늘은 이어나가보기로 한다.
우리 세대만큼 이동통신수단의 발달과 더불어 살아온 세대가 있을까할만큼 세상에 발명해놓은 수단을 다 활용했던것 같다.
유치원 다닐때 시골 할머니집에서 오른쪽 손잡이를 '디그렁디그렁'돌려서 교환원에게 '뒷골댁네'를 외치면 교환원은 귀신같이 이름도 성도 모르는 뒷골댁네를 연결해주던 시절부터, 비가 오면 우산 가져오라고 그 여린 손가락으로 주황색 공중전화의 동그란 다이얼을 '디그리리 디그리리'돌렸던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영화 '라붐'의 소피마르소가 길고 긴 전화선을 드리우고 어른 머리만한 전화기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수화기를 들어 통화를 하는 장면을 보며 '우리집 전화기 전화선은 더럽게 짧네' 라고 생각할 즈음 아빠는 4구 멀티탭 만한 맥슨무선전화기를 사오셨다.
소피마르소가 긴 선을 드리울 때 안테나 선을 주욱 뺀 다음에 적어도 집안 3미터 안에서는 통화가 가능했던 신기방기했던 가내 무선전화기를 통해 대학교 합격 소식을 듣고, 아빠와 함께 삐삐파는 가게에 가서 012로 시작하는 번호를 하나 받아서 이름도 참 X세대 다웠던 Xing 이라는 삐삐(무선호출기)를 입학선물로 하나 받아왔더랬다. 삐삐는 정말 '삐삐'라고 울리는 기본음이 있었다. 삐삐 판매아저씨는 친절하게도 투명케이스와 허리띠에 장착할 수 있는 귀여운 집게도 챙겨주셨지만, 결코 착용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도 공중전화의 긴 줄을 서며 별 시덥잖지도 않은 음성 메세지를 확인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남긴 음성을 긴 줄을 기다려 확인해야 했던 그 기다림, 설레임, 등등의 시절부터 나의 음주 생활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공중전화의 추억.
21세기 밀레니엄을 3년 앞둔 새내기 시절, 추억의 동전두개뿐이면 가능하던 주황색, 하늘색 공중전화는 사라지고 사이버틱한 은빛 로봇같은 공중전화기가 대학 교정을 일렬로 채울 때, 엑스세대의 갬성을 고려하여 프라이버시보호용 공중전화문까지 달려있던 시절이었다. (BGM. 015B 텅빈거리에서)
그날도 역시나 쪽닭집 막걸리로 온몸을 흠뻑 적신 후, 에트로 머리띠 사이사이로 잔디를 같이 심어 준 상태로 걸어서 갔는지 기어서 갔는지 기억도 가물한 상황에 내가 정신을 차린 건 꼭 움켜쥔 수화기와 지저귀는 새소리였다. 얌전하디 얌전한 주름치마에 가디건을 입고, 에트로 머리띠를 한 상태로 분명히 술을 먹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거의 물에 삼일쯤 담궈놓은 잔디인형의 몰골이 되어버렸다. 전화기에서는 공중전화 카드 빼라는 삑삑 신호음이 울렸고, 본능적으로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냈다. 예나 지금이나 취침 전과 기상 후는 항상 핸드폰과 함께하는거다.
삐삐에는 여러가지 숫자가 찍혀있었다.
1818, 486486, 828255, 엄마 번호, 아빠 번호, 구남친 번호, 내 친구 번호, 모르는 번호 ㅠㅠㅠㅠ
떨리는 손으로 012552**** 을 눌러 참담한 마음으로 음성메세지를 확인한다.
"오늘 기숙사 나오는 날 아니니? 집 안오니?(엄마 1번째 음성메세지)"
"전화해라 아빠랑 밥먹는다. 오늘 오니 내일 오니?(엄마 2번째 음성메세지)"
"메세지 잘 받았어.... 내가 더 할말은 없을 것 같아.(구 남친 메세지)"
"전화해라 죽고 싶냐?(아빠 음성메세지)"
"저기 누구신진 모르지만 음성메세지 잘못 남기신거 같아요. 혹시 제가 모르는 제가 아는 분이라면(뭔소린지) 내일 이번호로 다시 연락부탁드립니다.(모르는 번호로 찍힌 어떤 남성 메세지)"
"아 진상. 나 기숙사 들어왔다고. 고만 쳐먹고 들어가라고(1818 날린 내 친구)"
"나도 너 좋아했어. 그럼 우리 사귀는거다. 취중진담이랬어. 내일 내가 정식으로 (486486)"
하..... 내가 누구에게 어떤 음성을 보냈던가.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 그리고 이 486놈은 왜 자기 번호를 찍어놓지 않은건가. 대략 전화번호 수첩을 꺼내 후보자를 두세명 추린다. 미안하다고 술을 쳐 드셔서 그랬다고 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전화해야지 ㅠㅠ
그 놈의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다짐은 시티폰을 거쳐, 핸드폰, 그리고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까지도 이어졌다.
자 이제 다시 금주를 해야하는, 아니 해서 발생하지 않아야 할 일들에 대한 당연한 일어나지 않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다.
술은 인간을 용감하게 만드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모르겠다. 술은 기적을 행하기도 한다. 술을 먹으면 눈에 그렇게 잘 보이던 그 사람의 배경, 외모, 권력 따위가 무색해진다. 그 까짓거 니가 뭔데로 시전된다. 용감하지않았던 친구는 그날만큼은 선배한테 머리부터 들이밀어 대들고, 밀대를 거꾸로 쥐었다나.
매일 과민성대장염을 달고 사는 친구인데, 술을 들이키고부터는 그 병이 싹 없어지고, 여드름이 온몸에 창궐했던 또 누군가는 여드름이 싹 사라져 알콜이 자신의 온 몸을 구석구석 소독해준거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기적과 용맹중 최고는 술먹고 하는 문자질과 전화질일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면 그 모든 객기는 5월 가뭄 모내기논 물마르듯 증발하고, 이불을 걷어차는 정도면 감사할 정도가 되어버리는게 문제인 것이다.
술이 모든 것을 용감하게 만들어주지만, 그 용감은 무모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술은 우리를 용감하게 하는 이 아니라 무모하게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자. 가장 용감한자. 지금 그 술잔을 손에서 내려놓는 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