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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Aug 29. 2022

왜 남자들은 병원에 가는 걸 싫어할까?

대한민국 가장들의 책임감

 점심시간이 막 끝나갈 때쯤이었다.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는 아빠 허리가 점점 안 좋아진다고 걱정이었다. 협착증 진단을 받은 지가 벌써 수년 전이다. 꾸준히 약을 먹고 관리해야 하는 병인데 아빠는 병원에 잘 가지도 않고, 허리를 쉬게 하지도 않았다. 인테리어 일을 하느라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할 때가 많은데 쉬는 날에도 어김없이 텃밭에서 상추, 양파, 고구마 등 온갖 채소를 재배하느라 온종일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병원에 가라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말을 안 듣는다며 엄마는 답답한 마음을 내게 털어놓았다. 파스 한 장으로 버티는 아빠의 고집은 좀처럼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부모님이 옥신각신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엄마의 푸념을 들어줬다. 친정은 차로 5분 거리에 대형병원만 2개에, 문 밖을 나서면 크고 작은 병원들이 잔뜩 집합해 있다. 유치원생도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병원에 갈 수 있는 동네다. 그러니 엄마의 잔소리면 됐지 나까지 더 보태봐야 아빠를 병원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빠의 허리는 최근 급속도로 악화됐다고 한다. 통증 때문에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젠 정말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때가 왔다. 유명한 병원을 알아볼까? 그냥 무작정 차에 태워서 병원에 던져버릴까? 어떻게 해야 아빠를 병원에 보낼 수 있을까?


 엄마의 푸념을 겨우 끊어내고 역무실에 돌아왔을 때였다. 갑자기 에스컬레이터가 멈춰 섰다는 알람이 울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던 중년의 남성이 갑자기 넘어지자, 뒤에서 지켜보던 시민이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던 것이다. 넘어진 남성은 이마부터 광대까지 기다랗게 상처가 나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일행인 듯 보이는 중년 여성도 허리를 부여잡고 통증을 호소했다. 우선 두 분을 역무실로 안내하고 응급처치를 했다.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거꾸로 갔어요."


 남성의 말에 우리는 바짝 긴장이 됐다. 정말 에스컬레이터가 역주행을 한 걸까? 아니면 으레 치료비를 타려고 에스컬레이터 탓을 하는 사람인 걸까? 어느 쪽이든 골치 아픈 문제다. CCTV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나던 찰나,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찰지고 쫄깃한 등짝 스매싱이 남성의 등에 내리 꽂혔다.


"거꾸로 가긴, 뭐가 거꾸로가! 우리 아저씨가 요즘 몸이 안 좋아요. 항암치료를 받고 있거든요."


 CCTV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남성이 갑자기 중심을 잃었고, 뒤에 있던 아내까지 밀려 넘어진 것이다. 아내의 이어지는 잔소리에 남성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매싱의 여운이 남아있는 등을 어루만졌다. 치료비를 뜯어내려고 하는 건지 의심했던 마음이 미안해 나도 덩달아 머쓱해졌다. 두 분은 상처를 마저 지혈하고 역무실을 나갔다. 큰 민원 없이 사고가 수습됐다는 안도감도 잠시, 불편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이번만큼은 그냥 에스컬레이터가 거꾸로 갔다고 말씀드릴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도움의 손길을 한사코 거절하는 고객들이 있다. 주로 남성들이다. 특히 모임이 많은 연말연시에 취해서 승강장에 쓰러져 있는 중년의 남성들이 그렇다. 깨워서 역무실에서 잠깐 쉬다가 가시라고 붙잡지만 그들은 끝까지 사양하고 비틀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일이 많았다. 열차에서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져서 승객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역에 하차했던 중년 남성도 그랬다. 30분 내에 발작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으니 꼭 병원에 가야 한다는 119 구급대원의 권유를 끝끝내 거절했다. 에스컬레이터가 거꾸로 갔을지언정 내가 쓰러졌을 리가 없다는 가장들의 마지막 자존심인 걸까?


 대한민국 남자들은 해선 안 되는 게 참 많다. 심지어 살면서 우는 것도 세 번밖에 허락되질 않는다. 아파도 아픈 티를 내서는 안되고, 슬퍼도 슬픈 티를 내서는 안된다. 그건 약한 모습이고, 약한 모습은 남자답지 못하다고들 한다. 그러면서 책임져야 할 것은 참 많다. 모름지기 남자라면 가장, 장남, 남편, 남자로서의 책임감이야 말로 가장 큰 덕목이라 배우며 살아간다. 평생을 강인하게, 강인한 척이라도 하며 살아야 했으니, 나이 들어 약해진 자신이 민망하고, 인정하기 조차 싫을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가장들은 아파도 아프지 말아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병원에 가기 싫어했던 걸까?


 다음 쉬는 날에는 친정에 가야겠다.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느라 할아버지가 된 장난기 많은 남자를 만나야겠다. 잔소리는 접어두고, 아빠가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꼭 말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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