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적으로 좋은 것들만 쫓았던 것 같다. 단순히 물질적으로 '좋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말만 입으로 뱉고, 듣고. 나에게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들만 만나고, 그런 사람들만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생은 덧없고 찰나의 순간보다 짧으니, 나에게 좋은 말들을 해주고, 다정한 사람들만 남기고 싶은 욕심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동전에도 양면이 있고, 맛에도 쓴맛, 단맛, 신맛, 짠맛 이렇게나 많은 면들이 있는데, 나와 너 나아가 '우리'를 만드는 건 좋은 일만도, 좋은 말만도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올해 초 십몇 년 동안 친구 사이였던 이와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친구 사이임에도 나의 이야기를 120%로 털어놓을 수가 있는 사이가 있고, 반면에 65% 정도만 말하게 되는 친구도 있다. 그 친구는 후자였다. 알고 지낸 시간은 길어도 심적 거리가 늘 존재했다. 서로의 표현 방식이 달라서였을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만나는 동안 맞지 않는 부분들은 끊임이 없었고, 서로를 향한 피로도만 쌓여갔다. 그 친구는 나를 예민한 사람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그를 무심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이해해 보려고 했으나 끝내 이해를 포기하고 작별을 고했다.
알고 지낸 시간이 짧지 않아 여전히 마음이 편치는 않다. 가끔 꿈속에서 만날 때가 있다. 다행히도 싸우지 않고 잘 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나온다. 나에게 '너의 예민함을 감당하기 힘들다.'라고 보냈던 그 친구의 문장이 아직도 종종 나의 심장을 후벼 파지만 조금씩 덤덤해지는 중이다.
모든 관계가 동일하지는 않다. 우정이 사랑 같고, 사랑이 우정 같기도 하다. 우리 관계가 '친구'로 유효했을 때의 나는 내 마음을 아끼지 않았기에. 내가 주고 싶은 마음을 다 주었기에 미련은 없다. 뒤돌아볼 마음이 없다. 그게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다. 비록 상처는 남은 결말이지만 그 상처에 미련까지 남았다면 지금의 나는 더 힘들었을 테니깐. 끝을 내고도 '차라리 잘됐어.'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좋지 않은 일들을 겪어내며 아파하고 나를 돌아보고 다시 나아가며 '우리'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 싶다. '완성'이라는 건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나이에도 관계로 힘들어하고 친구 문제로 속상해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깐. 결국에 영원은 없다.라고 생각하고 살면 삶이 한층 더 자유로워질 것 같다는 생각을 이번에 하게 됐다.
살다 보면 한 번씩 찾아오는 행복한 일들로 용기를 얻는다면, 좋지 않은 일들을 겪고 고통을 감내할 때는 살아갈 이유가 생긴다. 우리는 여러 미완성의 모습으로 삶을 계속해서 꾸려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