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 완벽하게 '가을이다!'가 절로 나오던 어느 아침.
체육관에 가기 위해 가방을 쌌다. 시합을 앞두고 수업이 끝난 후에 언제든 스파링을 할 수 있게 필요한 장비를 모두 챙겨서 다니고 있는 요즘이다. 등에 매는 가방에는 글러브와 스트랩, 텀블러, 마우스 피스를 넣었고, 또 다른 가방에는 정강이 보호대, 헤드기어, 이어폰을 챙겼다. 조금은 쌀쌀하다 싶은 아침 바람을 맞으며 체육관에 도착! 부상 방지를 위해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해주었다.
수업 전에 워밍업으로 줄넘기를 하고 있는데 관장님이 다가오셨다.
"줄넘기 다 하면 바로 링으로 올라와~"
시합이 약 18일 정도 남았고, 관장님께서는 본격 '시합 준비 모드'라고 하셨다. 오전부에는 나를 포함한 시합에 나가는 사람 3명이 링 위에서 섀도우 복싱을 먼저 했다. 아...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섀도우 복싱. 링 아래에서는 10시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 민망했다.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를 즈음 나를 구원해줄 타이머가 울렸다. 남은 시간은 3분 동안 돌아가며 미트 치기와 팔 굽혀 펴기 20개, 5라운드를 진행했다. 5라운드를 모두 끝낸 후 뜨거운 숨을 밀어냈다. 체력 소모가 상당했지만 그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피드백의 시간. 관장님은 각자의 강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체력'이라고 답했다. 아직 기술도 많이 부족하고, 짧은 팔다리로 상대에게 빠르게 공격할 자신은 없었지만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관장님은 체력이 자신 있다면 그것을 강점으로 만들어 상대를 지치게 만들어라-!라고 하셨다.
1. 상대와 멀리 떨어져 있지 말고,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 상대가 공격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만들기.
2. 체력이 된다면 상대보다 많이 움직이며 공격하고 사이드로 빠지기.
(상대가 공격을 할 때 나는 사이드로 빠져서 다음 공격을 개시하는 거다.)
3. 상대와 가까이 붙어 있을 때는 나의 파워와 체력을 무기로 바디 공격하기.
4. 상대를 밀며 체력 소진시키기.
5. 어느 상황에도 튀어나올 수 있는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나만의 시그니처 공격 동작 만들기.
관장님께서는 승패가 없는 시합인 만큼 안전하고 경험을 쌓는 위주로 경기에 임하라고 하셨다. 또, 그만큼 심판의 개입도 많을 것이며 링 위의 심판은 나와 상대의 안전을 지켜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과감히 써볼 수 있는 기술과 공격은 다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본격 '시합 준비 모드'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코칭과 시합날 링 위에서의 주의점들을 듣고 있자니 묘한 설렘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는 '정말 재미있게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킥복싱 경기를 찾아보지도 않았고, 완벽히 초보자인 나는 당일의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아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연습해 보기로. 오늘부터 나의 시그니처 동작은 파고들어 바디 치기! 하지만 이 동작은 아직 확신이 없으니 샌드백을 좀 더 빡세게 쳐보기로.
덧붙이기 :)
최근 언니가 보기 시작한 <귀멸의 칼날>의 한 장면을 말해주었다. 주인공 탄지로의 동생이 혈귀화가 되었는데, 탄지로는 그런 동생을 지키기 위해 귀살대에 들어가고자 한다. 모든 수련을 마친 주인공은 최종 선별을 앞두고 길었던 머리를 자른다. 탄지로처럼 직접 머리를 자르지는 못했고, 당장 미용실로 달려갔다.
미트를 치다 보니 제법 긴 옆머리와 앞머리가 자꾸 내려와 시야를 가려 답답했던 참이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무겁게 내려앉았던 지저분한 머리카락들을 걷어내고 시작이다.
이런 비장한 마음과 앙다문 입술이 나 역시 웃길 때도 있지만, 경기의 크기,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시험이든, 경기든, 시합이든 그것에 임하는 나의 마음의 크기와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약 3주 뒤, 시합을 마친 나는 이전의 나와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거다.